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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태산이높다하되 Dec 04. 2021

문종 독살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4(세종, 문종)

준비된 왕

이도, 세종은 태종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명석하고 인내심 또한 대단했던 그는 여러 가지 업무를 동시에 신속 정확하게 처리했다. 학문적 역량이 뛰어났으면서도 세종은 인본주의적 가치관도 지니고 있는 군주였다. 노비들의 출산 휴가를 제안할 만큼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임금은 천성이 학문을 좋아해 세자로 있을 때 항상 글을 읽되 반드시 백 번씩을 채우고, <좌전>과 <초사>같은 것은 또 백 번을 더 읽었다. 일찍이 몸이 불편할 때도 역시 글 읽기를 그만두지 않았으니, 병이 점차 심해지자 태종은 내시를 시켜 갑자기 책을 모두 거두어 가지고 오게 했다. 그리하여 다만 <구소수간> 한 권이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는데, 임금은 천백번을 읽었다." <연려실 기술> 권 3, 세종 조 고사본말. 다음 백과 참조


보통 사람은 아니다. 과학, 농업, 의학, 군사, 음악 등 모든 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는데, 모두 조선의 실정에 맞게 적용했을 만큼 세종은 교조적이지도 독단적이지도 않았다. 도전과 탐구 정신이 뛰어났던 인물이었다.


국방 문제에 있어서는 4군 6진 개척(김종서)을 들 수 있고, 농업은 <농사직설>, 의학은 동양최대의 의학백과사전인 <의방유취>, 역사에서는 <고려사>편찬, 과학에서는 규표, 간의,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발명 등 신하들과 함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업적을 남긴다. 그 중의 제일은 물론 훈민정음 창제다.


훈민정음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글'이 훈민정음이다. 한글이라는 이름은 훗날 주시경 선생이 지었다. 역사학자 이덕일 박사는 '바른 소리글' 또는 '바른 글'이라고 했어도 괜찮았을 것 같다고 말한다. 물론, 한글이라는 말의 의미도 뜻깊다. '대단한 글' 또는 '중심이 되는 글'이라는 의미가 있으니 말이다.


이이화 선생의 연구에 따르면, 훈민정음은 세종이 자신과 세자였던 문종, 그리고 딸, 정의공주와 함께 발명한 것이라고 박시뱍은 소개하고 있다. 성삼문의 <해동잡기>에 이러한 내용이 있다고 한다.


문종 독살설

문종이 요절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그의 왕 재위기간이 2년 3개월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종이 세자로 재임한 기간이 무려 20년이 넘는다. 사망 당시 나이는 39살이니 요절은 아니다.

4권, 196쪽

문종의 사망원인은 종기다. 등에 난 종기는 아래위로 길이가 30센치가 넘고 그 깊이도 몇 센티미터 씩 됐던 모양이다. 이덕일 박사는 종기를 치료하는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치료를 담당했던 어의와 도승지, 그리고 수양대군을 의심한다. 사료는 문종이 독살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문종의 치료를 담당한 어의는 전순의, 치료의 감독은 도승지, 강맹경과 수양대군이었다. 문종을 독대하며 치료를 담당했던 전순의는 며칠 지나면 좋아질 거라고 말해 시약청의 여러 중신들을 안심시켰지만 왕은 급격히 상태가 나빠져 손쓸 틈없이 죽게 된다.

이덕일 역사TV, 문종을 독설한 어의 전순의

종기와 기름 많은 고기는 상극이라고 한다. 그런데 전순의가 문종에게 구운 꿩고기를 올렸다는 사실을 의금부가 밝혀낸다. 전순의는 의학적 상식에 부합하는 치료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종 사후, 전순의를 처단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주장이 있었지만 단종은 주저하게 된다. 수양대군이 옹호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독살설의 주장은 근거가 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와 황보인을 때려 죽이고(계유정난), 단종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고 나자, 좌익원종공신에 책봉되는 인사 중에 사형을 당했어야 하는 어의, 전순의가 들어있었다고 한다.


인간사의 무도함, 비애 같은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왕좌를 위해서는 형을 죽여야 했던 수양, 그가 올바른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 이런 선택을 했을까?


문종은 20대 후반에 낳은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떴다. 왕비 권씨는 그 아들을 낳다가 세상을 떠났고, 그 아들의 조모가 되는 소헌황후와 조부, 세종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열두살의 어린 나이에 사고무친이 된 노산군은 조선 제 6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단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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