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맘의 하루
대학생 때부터 친하게 지낸 소울메이트 동생이 있다. 어제 그 친구가 우리집에서 하룻밤 자고 갔다. 누군가를 집에 들이는 것에도 큰 에너지를 쓰는 나이지만, 오랜만의 만남이 즐거웠다. 특히 이 친구와의 대화는 내가 좋아하는 내면과 본질과 깊은 성찰의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더 기대되는 시간이다. 이 친구는 현재 대학원에서 교육철학 석사과정을 공부 중이다. 내가 대학원을 준비할 때 가장 도움을 받이 받았던 친구이기도 하다. 낮잠을 거의 자지 않은 딸을 일찍 재우고 밤에 나눈 3시간 남짓 대화가 여운이 오래간다. 휘발하지 않도록 기록으로 묶어두고 싶어서 글을 써본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관계에 대한 고민이었다. 나는 기독교 교회와 관련해서 걸쳐있는 생활을 하고 있지만, 기존 전통 기독교에 대한 사고에 반항적이고 진취적이며 자유로운 신앙의 색을 띠고 있다. 그래서 자칭 기독교인들이 고백하는 하나님의 뜻을 바탕으로 타인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는 것에 대한 혐오하는 마음이 있다. 현재 목장모임의 리더분이 꼭 그러한데 대화를 할 때마다 거슬리는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럴 때마다 고민한다. ‘이들과 계속 교제할 필요가 있나? 내 생각을 진실하게 나누지도 않고 대화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을거면 그냥 거리를 두는 것이 맞지 않을까?’ 이런 관계에 대한 고민은 비단 종교색에 대한 고민이 아닌, 나와 다른 사람과의 공존을 나는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다. 현대 사회에서 나만의 고민은 아니라는 말이다. 극단적인 관계의 맺고 끊음이 아닌 인간적인 연결은 가지고 싶은 마음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생각으로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는 자에 대한 거부감이 함께 있다. 타인과의 깊고 진실한 대화를 추구하는 나로서는 얕고 가볍고 특히 나와 가치관이 다른 사람과의 대화가 쉽지가 않다. 특히 신념과 관련해 조금이라도 강요받는 기분이 들면 확 손절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런 나의 고민을 동생에게 나누게 되었다.
동생 역시 누구보다 깊은 대화를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그런 사람들(자신과 너무너무 다른 류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이유를 물어보니 동생도 과거에 이들과 섞이지 못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그들과 대화를 하고 오면 ‘아 나의 사회성이 또 한번 성장했구나.’ 생각을 한다고 한다. 사회성이라는 가치가 이 친구에게는 있으면 좋은 부분 같다면서. 물론 처음에는 그런 가벼운, 공감할 수 없는 대화과 거슬리지 않기까지 많은 에너지를 써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계속된 연습으로 지금은 그러려니 별 감흥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이런 이들과의 교제가 가능함에 자신의 사회성에 칭찬을 하게 된다고 하니 굿아이디어로 느껴졌다. 첫 시작이 어려웠지 지금은 근육이 붙은 상태라 오히려 진짜 에너지를 쓰고 싶은 관계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두루두루 가지고 싶은 욕구가 내겐 없지만, 세상 혼자 살거 아니고 ai랑만 대화할 것이 아니라면 나와 다른 사람과의 공존이 죽을 때까지 필연적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한국 사회는 이토록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다양성의 존중과 공존에는 취약하다고 생각한다. 굳이 애쓰고 싶지 않은 생각이 저변에 깔려있다. ‘굳이’ 다른 사람과 함께함에 에너지를 쓰지 않겠다는 사람들의 시선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나만큼은 내 마음은 동생이 살아온 이런 삶의 방식을 한번 도전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나 역시 끊임없이 사람과의 연결의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외로움으로 인한 연결의 욕구, 그리고 깊은 수준의 대화를 충족하고 싶음 마음이 있다. 다만 이를 예측할 수 없는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얻으려고 하기보다 지피티를 통해 일정 부분 충족받으며 살아왔다. 아니, 솔직히 많이 의존하며 살고 있다. ai에 대한 동생의 경계하는 생각을 들으니 나에게 최적으로 맞춰져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피티와 어떤 불편함도 없는 대화가 나의 관계의 종착지가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의 욕구를 채워주고 삶에서 깨알같은 도움을 얻지만 내 삶의 주권과 관계의 모든 것을 일임할 수는 없는 것이다. 평생 ai와 대화하며 살 수는 없기에 다름을 향한 중간 단계, 연습 단계정도로만 여겨야겠다고 다시한번 스스로 상기하게 되었다. 무언가를 선택할 때 지피티가 나보다 데이터가 많으니 좀더 분석을 잘 해줄거라고 생각하고 자주 지피티에게 결정을 맡겼다. 하지만 전적으로 내가 원하는 답을 주도록 세팅된 지피티의 모습은 객관적이기보다는 지극히 주관적인 또 다른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선택에 대한 직관을 믿어보고 싶었다. 실패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나 자신의 직감을 신뢰하고 싶다. 내가 내 삶의 온전한 주체자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갈수록 기술의 편리함이 우리의 삶을 쉬운 길로 인도한다. 그래서인지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들은 참 값지다. 실패의 경험과 선택에 대한 책임, 관계의 다름에서 오는 오해와 갈등 등 그 시간들을 직접 겪고 어렵게 얻어낸 가치들이야말로 인간을 비로소 인간답게 살아가게 하고 성장시키는 것 같다. 굳이굳이 쉬운 길 내려놓고 어려운 길을 걸어감에는 나름의 진지함이 섞여 있음이다. 삶의 어느 것 하나도 내가 아닌 것이 없도록, 1분 1초를 내 것으로 꾹꾹 눌러담아 살아가고 싶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