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든 안그러든 너 자체로 소중해
사람의 얼굴엔 이야기와 그 고유의 에너지가 담겨 있다.
나는 늘 그것을 느꼈다.
눈빛, 말투, 미세한 표정, 얼굴의 흐름 속에서 그 사람의 삶을 읽는 습관이 생겼다.
마치 관상가처럼.
사람들을 보면, 내 안의 데이터베이스가 돌아간다.
“아, 저런 유형은 이런 식으로 흘렀지.”
“저 얼굴의 흐름은 예전 그 사람과 비슷하군.”
그리고 나는 조용히 판단한다. 가까이할지, 거리를 둘지.
언뜻 보기엔 날카로운 통찰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사실은 너무도 인간적인 감정이 숨어 있다.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잘 맞지 않을까 두려워서,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틀리게 만들까봐 두려워서.
나는 언제부턴가 관상이라는 프레임에 나 자신까지도 가뒀다.
거울 속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이 얼굴은 망한 관상이야”라고 혼잣말하던 시절도 있었다.
마치 김구 선생이 젊은 날, 자기 관상을 보고
“나는 성공할 관상이 아니다”라고 여겼던 이야기처럼.
하지만 김구는 그 관상을 넘어서 독립운동의 길로 나아갔고,
나는 그 비슷한 절망감 속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답이 없는 인생이지만,
어쩌면 너무도 특별한 운명이기에 지금 이토록 고된 걸지도 몰라.”
그건 근거 없는 희망이었다.
아니, 희망을 가장한 합리화였다.
내 인생이 너무도 고단하니까,
그 고단함이 ‘원래 잘 될 운명’이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던 거다.
하지만 그 믿음의 바닥엔
두려움과 무기력,
그리고 삶에 대한 책임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운명이라는 단어 뒤에 숨으며,
스스로를 더 이상 들여다보지 않아도 된다고 믿었다.
그건 내가 만든 가장 정교한 방패였다.
“나는 원래 그렇게 태어난 거야”라는 말 뒤에 숨은 나.
하지만 지금은 조금씩 안다.
관상이 내 인생을 결정짓는 게 아니라,
내가 관상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인생을 회피하고 있었다는 걸.
그걸 알아차린 순간,
나는 조용히 그 방패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기 전에
먼저 내 마음을 바라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자주 묻는다.
“정우야, 지금 너는 무엇이 두려워 그 얼굴을 해석하고 있니?”
그 물음 앞에 진실은 고개를 든다.
사랑받고 싶어서,
틀리기 싫어서,
실패가 너무 무서워서.
그 모든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나는 더 이상 관상에 갇히지 않는다.
나는 ‘보기’를 멈추고,
‘존재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렇게,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