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 클났네!"
아직은 어둠이 익숙한 시각, 문을 열자 단말마로 튀어나온 첫마디, "아고, 클났네."
눈이 귀한 이 남녘섬에 켭켭이 가라앉는 눈송이들, 점으로 박혀있는 낯익은 풍광들이 탈색되어 버린 이 새벽녘에, "와, 예쁘네!"란 감탄사가 아닌, "아이고".
출근은 할 수 있을라나? 오늘 작업은 어떡하지? 운전하는데 사고는 나지 않을까? 골목을 쓸어야 하나? 질척일 텐데....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전에, 현실 문제가 더 깊고 빠르게 와닿은, 어쩜 당연할 수밖에 없는 반응이 사뭇 서글퍼진다.
세월을 따라오는 무뎌짐. 적어도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일렁이는 억새,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따끈한 호떡 하나...
오뎅국물 앞에 두고 그리운 이들이랑 저물도록 도란도란 따뜻함을 노래하고 싶었다. 개똥철학으로 밤새워 게거품을 물고,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의 쓸데없는 문제로 벗들이랑 침 튀기며 살기를 바랬다. 크게 음악을 틀어놓고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바람이 불면 부는 데로 작은 벤치에 앉아 인생처럼 쓰디쓴 한잔의 커피를 들이키고 싶었다.
무뎌짐, 덤덤함.
세월과 삶의 여정이 남겨주는 흉터일까. 자연스러운 변화를 애써 부정하려는 나의 철딱서니 없는 푸념일까.
몬난이와 노랑이의 분주함에, 하나 둘 발자취가 남겨지고 있다. 새하얀 눈밭 위로.....
쉼표가 있는 풍경의 설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