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의 또 다른 이름, 죄책감과 사랑
1. 다시 미국 일상으로 돌아온 후
나도 엄마와 마찬가지로 지난주에 소개한 애도의 네 가지 과업을 겪었다.
1. 상실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2. 상실의 고통을 충분히 경험하기
3. 고인이 없는 환경에 적응하기
4. 고인과의 정서적 연결을 재배치하고 삶을 계속하기
아빠를 상실했음을 실감하는 데는 그 어떤 노력도 필요하지 않았다. 가족의 죽음을 겪은 유가족이라면 알다시피 한 사람이 죽으면 정말 많은 서류 절차들이 필요하다. 사망 신고를 하고, 주변인에게 부고문을 보내고, 장례식을 치르고, 조문객과 고인에 대해 추억하고, 납골당에 아빠의 유골을 모시고, 유산과 유품을 정리하고, 아빠가 사고 나셨던 차를 마주하고 폐차 처리하고, 아빠의 핸드폰 번호를 해지하고… 한국에서 가족들과 함께 이런 업무들을 처리해 나가면서 나는 아빠가 우리를 아주 떠나갔음을 차근히 배워갔다.
한 달이 지나 미국에 돌아온 후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감사하게도 약국장님이 한 달 정도 휴가를 주셨으니 이제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일을 하면서도 일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자주 고통스러웠다. 약국에서 처방전을 체크하다가도 갑자기 눈물이 수돗물처럼 왈칵 쏟아지기 일쑤였다. 눈물이 흐르기 전에 재빠르게 화장실로 달려가 수돗물을 틀고 숨죽여 울었다. 어떤 날에는 한 환자분이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고 주저앉고 울었다.
퇴근하고 무기력하게 멍하니 앉아있다가 또 눈물이 툭!
드라마에 집중해 보려다가도 교통사고 장면이 나와서 소리를 치며 또 눈물이 툭!
자다가도 아빠가 꿈에 나와서 깬 후에도 보고 싶은 아빠 얼굴이 떠올라 또 눈물이 툭!
정말 눈물은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여지없이 나왔다. 인간의 몸은 60-70%가 물이라는데 아빠가 돌아가신 후 지금까지 내가 흘린 눈물의 양으로 보자면 내 몸의 3분의 1은 없어진 것 같았다. 눈물을 흘리고 날 때마다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마음이 너무 자주 아팠다. 마음이라는 것을 내 안에서 꺼낼 수 있다면 잠시 냉동고에 넣어두고 싶은 적도 많았다. 잠깐이라도 마음의 고통이 정지되어 내가 아빠의 부재에서 해방되어 잠시라도 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아빠의 부재는 나에게 고통스러웠고 아빠가 없는 이 세상에 적응하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사실은 2년이 지나가는 지금도 아빠의 부재에 적응 중이다. 아빠와 생전에 공유했던 추억들을 떠올리며 아빠와의 기억을 내 현재 삶 속으로 가져오기도 한다. 아빠를 내 삶 속의 기억으로 머물게 하는 방법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아빠가 좋아하셨던 음식을 찾아 먹기도 하고, 아빠에게 종종 편지를 쓰기도 하고, 또 아빠와 함께 갔던 추억의 장소도 가본다. 내가 살아있는 한 이 과업은 계속될 것 같다. 내 마음속에 아빠의 흔적은 늘 남아 있을 것이다.
2. 정서적으로 미성숙한 부모의 성인 자녀인 나
심리학자 린지 깁슨 (Lindsey C. Gibson)은 <정서적으로 미성숙한 부모의 성인 자녀들>이라는 책에서 정서적으로 충분히 돌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자라서도 자신보다 타인의 마음을 먼저 살피는 어른이 되기 쉽다고 말한다.
부모가 화가 나지 않도록, 부모가 실망하지 않도록, 관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아이는 스스로를 조절한다. 어릴 때부터 이해받고 인정받기보다 타인의 감정을 눈치 보며 알아차리고 관계의 균형을 스스로 조정하는 법을 먼저 배운 아이들은 성인이 된 후에도 타인의 감정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무의식적으로 떠맡고는 한다. 이들은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이나 불안을 늘 안고 산다. 그것을 잠시 잊기 위해 어떤 습관이나 관계, 혹은 자극적인 것들에 의존하게 되기 쉽다. 싫어하는 부모의 습관을 성인이 되어 반복하며 중독이 되고 결국 부모의 상처와 비슷한 상처를 갖게 되는 어른도 있다.
이 심리학자가 설명한 ‘정서적으로 미성숙한 부모의 성인 자녀들’ 중 하나가 나이다. 정서적으로 미성숙했던 나의 부모님의 양육 태도는 ‘방치’였다.
정서적으로 미성숙한 부모에게 양육을 받은 나는 계획하던 일이 잘못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책임을 나에게로 끌어당긴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빠를 상실하고, “내가 더 잘했어야 했는데”라는 죄책감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사실에 대한 판단이라기보다는 오래전부터 내 몸에 배어있는 마음의 방향이었던 것 같다.
3. 애도의 또 다른 그림자, 죄책감
어린 시절의 영향으로 모든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항상 나의 탓으로 돌리는 게 습관화된 나에게 아빠를 향한 애도 역시 죄책감을 수반하게 되었다. 아빠를 잃은 후 나는 아빠와의 장면들을 반복적으로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때 내가 조금만 더 다정했더라면,
조금만 더 자주 연락했더라면,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우울증과 중독 전문 상담소를 알아봐 드렸다면,
아빠를 더 안아드렸다면…
또 사고가 난 그날, 아빠가 운전을 피하실 수 있도록 택시를 예약해 드렸다면,
눈이 좋지 않으신 아빠에게 새 안경을 맞춰드렸더라면,
운전 면허증 반납을 진지하게 더 설득했더라면…
나는 어릴 때부터 아빠가 엄마에게 좋은 배우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딸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나는 아빠에게 편지를 자주 썼었는데 편지의 내용에는 늘 아빠에게 술과 담배를 줄이라는 당부와 함께 엄마에게 이렇게 저렇게 말을 해주고 아빠의 행동을 바꿔보라고 조언을 하고는 했다. 부부상담하는 프로를 꼭 찾아보며 내가 두 분의 치유자로 두 분을 바꾸고 싶은 나의 욕심 때문이었다. 나의 부모님이 행복한 부부가 되기를 그 누구보다 바랐던 나는 그 무엇보다 아빠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그런 반복적인 조언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에게 변화는 없었고 나는 자주 우울했다. 급기야 나는 집과 고국을 떠나서 미국에서 나의 삶을 개척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두 분의 불행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었던 것 같다.
미국에서 혼자 지내는 것은 물론 쉽지 않았다. 자주 외로웠다. 자주 가족이 그리웠다. 어차피 함께 있으면 불편하고 답답한 가족이어도 나에게는 집이었다. 외로움을 달래는 도구로 나는 음식을 택했고 점점 폭식증이 심해지면서 심리 상담을 받게 되었다. 상담을 통해 나의 가족을 되돌아봤다. 내 상처를 후벼 파고서야 나의 폭식증은 잠잠해졌다.
약대를 졸업하고 약사가 된 후 나는 나의 삶을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퇴직하신 아빠가 갑자기 위암 판정을 받으셨을 때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 가족에게 언제든 드리울 수 있음을 깊이 깨달았다. 나는 가족들과의 마지막을 자주 상상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오빠가 이 세상을 떠나면, 아니면 내가 이 세상을 떠나고 남은 가족들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면… 이런 상상들을 자주 했다. 위 절제 수술 후 5년이 지난 후에도 체중이 계속 빠지시고 허약해지시는 아빠의 모습을 1년에 한 번 볼 때마다 아빠와의 마지막이 가장 먼저 올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마음이 아프지만 아빠와의 마지막을 아빠에게 종종 언급하고는 했다. 아빠의 마지막은 어땠으면 좋겠는지에 대해 여쭤봤다. 아빠는 “준비해 놓은 묘지도 없는데 나는 화장해야지… 죽으면 끝이지 뭐… 남은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야지.” 이렇게 말씀하시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아빠는 마지막을 얘기하는 것을 피하시는 눈치였다.
아빠와의 마지막 봄을 보내고 미국으로 다시 출국하는 날, 나는 아빠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니 아빠의 삶에 대해서 기록을 해주시면 좋을 것 같다고 부탁드렸다. 아빠의 어린 시절부터 행복했던 순간, 슬픈 순간, 자랑스러운 순간, 후회되는 것들을 공유해 주시면 나에게 큰 재산이 될 것 같다고 고백했다. 내가 심리 상담을 오래 받으면서 내가 결핍된 부분에 대해 고찰해 본 결과 나는 감정 대화를 부모님과 충분히 하지 못한 것이 큰 결핍이라고 느꼈던 까닭이었다. 나는 그동안 아빠와 함께 여행을 가고, 나의 상처에 대해 고백도 하고, 아빠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며 아빠와의 마지막을 준비해 왔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오빠는 내가 아빠에게 너무 단호했다고 얘기했다. 아빠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나의 모습이 아빠는 서운하셨을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남편은 내가 죽음이 아빠에게 닥치지 않고 맞이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렸다고 얘기해 줬다. 충분히 가족 여행도 모시고 갔고 가족사진도 찍어드리고 대화도 많이 하려고 노력했다고… 나처럼 속이 깊은 딸이 어딨냐면서 죄책감을 갖지 말라고 자주 말해주었다.
가족사진을 찍던 날, “딸이랑 사위덕에 아빠가 호강하네!” 눈물이 맺히시면서 고마워하시던 아빠의 말은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오빠의 말처럼 아빠는 내가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에 서운하셨을까?
아빠 유품을 정리하는데 오빠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아빠가 자살하신 것은 아닐까 자꾸 생각이 드네… 가족들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오빠는 아빠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아빠는 생명을 끊으실 만큼 모진 분이 아니셨다. 우울증은 있어 보이셨지만 삶의 의지가 매우 크신 분이셨고 형제들에게 도움을 주려 끝까지 알바도 하셨던 분이었다.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아빠에게 세상인 친할머니가 아직 살아계신데 먼저 세상을 떠날 결심을 하셨다는 것은 정말 아빠가 내릴 결정이 아니었다. 아빠는 친할머니의 마지막까지 잘 정리해 주시고 형제들에게 골고루 재산을 나눠주셨을 책임감 있는 아들이었다. 본인보다 본인 형제들과 부모를 더 사랑하셨던 우리 아빠의 마지막은 절대 아빠가 선택할 만한 길은 아니었다.
오빠에게 어쩌면 오빠는 아빠를 그렇게 모르냐며 조목조목 이유를 대며 아빠가 자살이 하신 것이 아니라는 내 주장을 강하게 펼쳤다. 내 말을 끝까지 들은 오빠는
“아, 맞아…. 우리 아빠가 그런 사람이었지…” 하며 깊게 생각에 잠긴다. 그 침묵 속에서 혹시 아빠가 자살을 하실 정도로 우울하셨는지 생각하며 죄책감이 밀려온다.
오빠는 가족사진을 아빠와 함께 못 찍어서 아쉽다며 부모를 잃어버린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와 엄마도 함께 울며 옷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너무 울고 너무 눈물을 닦아서 눈 주위가 빨갛고 쓰라리다. 아빠를 잃고 쓰라린 내 마음보다 눈이 쓰라린 것이 덜 고통스럽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욱신거리는 마음의 격통보다는 차라리 몸이 쓰라린 통증이 낫다고 생각이 들었다. 단호해 보였던 딸내미는 사실 그 누구보다 마음 약한 겁쟁이 딸이다.
4. ‘만약에’의 늪
아빠가 돌아가신 후 죄책감으로 가득했던 애도의 시간은 감정적으로 미성숙함을 물려받은 나에게 어쩌면 당연한 감정이었다. 애도의 시간에 찾아오는 죄책감은 단지 마지막 장면을 돌아보는 후회라기보다, 오래전부터 내 안에 배어있는 마음의 습관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나에게 애도는 떠난 아빠를 보내는 일과 함께, 내가 평생 너무 쉽게 내 탓을 해왔다는 사실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만약에’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내가 생각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돌아가신 아빠가 원하실 모습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아빠는 내가 미안함을 느끼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실 것이다. 아빠는 우리 가족 중에 나에게 유일하게 늘 격려를 해주던 가족이었다. 내가 잘하면 아주 잘했다고, 못해도 잘했다고 하던 아빠였다. 청소년기에 공부를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컸던 나는 아빠가 매번 격려와 칭찬만 하는 것이 불만인 적도 있었다. 폭식증으로 내가 깨어내지 못한 나의 내면의 문제를 마주해야 했을 때야 비로소 아빠가 나에게 준 격려의 힘을 믿게 되었다. 나의 성장에 아빠의 격려가 없었다면 내가 지금의 모습으로 자라날 수 없었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난 죄책감 있는 딸보다 아빠의 자랑스러운 딸로 살기로 선택하며 ‘만약에’의 늪을 빠져나온다. 이따금씩 늪이 너무 깊어서 빠져나오기 힘들 때도 있지만 이 방법만큼 통하는 방법은 없다. 아빠의 자랑스러운 딸인 나는 오늘도 그 늪을 마침내 건너고야 만다.
5. 애도의 또 다른 이름, 사랑
아빠를 애도하는 마음이 매일 가득 차 있지는 않지만, 작고 사소한 것들이 문득 아빠를 생각나게 한다. 매일같이 울던 내가 요즘에는 어떤 날에 아빠가 좋아하는 꽃을 보며, 또는 아빠가 해주었던 말을 생각하며 행복한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어느 날에는 아빠가 떠올라도 눈물이 아닌 미소가 먼저 나온다. 아빠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아빠가 살아계신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것 같다. 현재에 사는 나를 끌어내고 과거로 가서 현재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지금도 수만 번 정도 ‘만약에’를 생각한다. 고통스러운 ‘만약에’라는 죄책감은 가끔 통제가 안 될 때가 있다. 이런 생각은 나를 무력하게 하고 생각이 이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하면 막을 수가 없다.
사람들은 밀물과 썰물 같은 애도의 감정이 꽤 오랜 시간 지속될 것이라고 조언해 주며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지만 조금씩 나아진다고들 한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애도는 가장 예상하지 못할 때 파도처럼 왔다가 간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 2년이 지나가는 지금, 나는 일상생활은 잘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많이 괜찮아진 것 같다. 쇼핑 중독을 극복하면서 또 거친 감정들이 뿜어져 나오기도 하지만 말이다. 나는 애도의 감정을 영원히 극복하지는 못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아빠를 애도하는 마음은 변화해 왔고 앞으로도 변화할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아빠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면 마음이 많이 아프다. 하지만 이 아픈 마음은 아빠가 내 곁에서 존재했음을 알려주고 내가 아빠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일깨워주는 증거이다. 아빠를 생각하면 터져 나오는 비탄과 슬픔을 간직하는 것이 내 안에 아빠를 영원히 살아있게 하는 것이라면 이 기억들을 잘 간직하고 이 감정들을 매번 겪어낼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빠가 남겨준 사랑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언제든 애도의 파도가 또 다가올 때마다 아빠를 잘 그리워하기 위해 내가 늘 조금의 힘과 용기는 지니고 살 수 있기를 바라본다.
사람은 죽는 순간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을 때 비로소 사라진다. 그래서 애도는 단지 누군가를 잃어버린 고통이 아니다. 그 사람이 내 삶 속에 얼마나 깊이 존재했는지를 보여주는 흔적이다. 슬픔이 오래 남아 있다는 것은 사랑이 오래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 마음이 아픈 이유는, 아빠가 내 삶 속에서 그만큼 큰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아빠를 떠올리며 종종 슬퍼할 것이다. 하지만 그 슬픔은 내가 감당해야 할 짐이 아니라 아빠가 내 삶에 남겨준 사랑의 무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애도의 파도가 다시 밀려올 때마다 그 슬픔을 밀어내기보다 조용히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렇게 아빠를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빠가 내 삶 속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가장 오래 기억하는 방법일 것 같기 때문이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화로 나누려다 보니 흐름이 끊기는 것 같아서 길지만 한 번에 올리기로 결정했는데 제 마음이 잘 전달이 되었으려나요?
지금까지 저는 브런치 북에 연재를 하며 저의 아픔들을 소리 내어 표현했습니다. 아무도 듣지 않더라도 소리 내어 아파해야 감정들이 결국 지나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파하는 모든 영혼들과 사람들이 아무도 듣지 않더라도 소리 내어 아파하기를 바랍니다. 거친 파도처럼 넘실대던 날것의 불편한 감정들이 결국은 잠잠해질 것입니다.
이번 연재를 마지막으로 저는 37회로 정리한 저의 이야기를 끝내고 새로운 주제로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티나를 응원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고 아픔을 가지고 사시는 모든 분들에게 따뜻한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