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정후에게 하는 말은 곧 나에게 하는 말과 같다.
아이는 내 말을 듣기 전에 나를 본다.
내가 어떤 표정으로 선택하는지, 내가 어떤 방식으로 나를 대하는지.
그걸 그대로 배운다.
정후가 “양보만 하고 자기 것을 챙기지 못하는 아이”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건 정후만의 문제가 아니라 내 습관일 수도 있다.
나는 종종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내가 괜찮은지 확인하기 전에 먼저 내어주는 쪽이었다.
양보는 꼭 해줘야 하는 게 아니다.
차 운전과 비슷하다.
무조건 끼워주면 사고가 난다.
내가 갑자기 멈춰버리면 뒤차가 들이받을 수도 있고,
상대가 정말 들어오고 싶은 상황이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양보는 ‘착함’이 아니라 ‘상황 판단’이다.
상대가 깜박이를 켰다고 해서 자동으로 내어주는 게 아니라,
지금 이 타이밍이 안전한지, 서로가 괜찮은지 보는 것.
괜찮을 때 “같이 가자”라고 길을 나누는 것.
그게 양보다.
우리는 양보를 미화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걸 놓친다.
양보한 뒤 마음이 불편했다면, 그건 양보가 아니라 ‘강요’였을 수 있다는 것.
나는 요즘 내 감정을 더 자주 확인해보려 한다.
양보한 뒤 내가 속상했다면,
정후가 속상했다면,
그건 “내가 원해서 한 선택”이 아니라 “좋아 보이기 위해 억지로 한 선택”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
“내 기분이 어땠어?”
조금 찝찝했다.
왜냐하면 정후와 약속했던 시간을, ‘일’이라는 이유로 내가 내 임의대로 깼기 때문이다.
누가 부탁한 것도 아니었다.
원장이 부탁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내가 먼저 배려해보고 싶었다.
그 마음을 들여다보면, 나도 이유가 있다.
나를 계속 쓸지 말지, 시급을 올려줄지 확정되지 않은 상황.
그럼에도 내가 먼저 배려해본 이유는,
“올해를 더 잘 보내보고 싶다”는 소망 때문이었다.
관계를 잘 만들고 싶었고,
나도 그 안에서 나쁘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다시 말해봐도 그렇게 할 것 같니?”
응. 그럴 것 같다.
그렇다면 후회할 선택은 아니었다.
나는 그때 ‘괜찮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거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양보가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괜찮아서 했으면 괜찮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마음이 불편해졌다면, 다음엔 안 해도 된다.
그건 변덕이 아니라 성장이다.
“나는 이제 내 마음을 더 잘 듣는다”는 신호다.
나는 나누기 싫을 때가 거의 없다.
아마 내가 대체로 괜찮은 편이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괜찮은 사람일수록, 괜찮지 않을 때를 더 조심해야 한다.
한 번 휘둘리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양보’가 아니라 ‘습관적인 포기’가 되기 때문이다.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살아야 부자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부는 돈만이 아니다.
내 마음이 타인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상태.
내 기준을 잃지 않는 상태.
그게 내가 원하는 부다.
예전의 나는 정후의 편의를 많이 봐줬던 사람을 떠올리며
‘나도 최대한 더 해줘야 하나’ 흔들릴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우선순위가 더 분명하다.
내 아이를 지키는 일이 먼저다.
그리고 내가 나를 지키는 일이 그다음이다.
양보는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다.
내 마음도 소중하고, 상대 마음도 소중하다는 걸 잊지 않는 선택.
서로가 안전하고 괜찮을 때 나누는 선택.
정후에게도, 나에게도
이 말을 계속 해주고 싶다.
“너는 괜찮아진 다음에 양보해도 돼.
네 마음이 편해지는 게 먼저야.”
이제 나는 “좋은 사람”보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선택한다.
양보는 의무가 아니라 판단이고, 배려는 희생이 아니라 합의다.
나는 양보로 관계를 증명하지 않기로 했다. 관계는 나를 줄여서 유지하는 게 아니라, 내 기준을 지키며 만들어가는 것이다.
내 마음이 찝찝해졌다면 그건 경고다. 다음에는 더 분명하게 말하면 된다.
괜찮을 때는 나누고, 불편해졌다면 멈춘다.
그 선택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정후를 지키는 일은 결국 나를 지키는 일이다.
내 기준이 선명해질수록, 정후의 기준도 선명해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