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 별점 ★★☆☆☆ 2/5
여러 의미로 변태적인 영화. 주인공들의 끈적하면서 순수한 멜로에 정신이 빨림. 계속해서 아!를 외치게 하는 3부 구성은 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는 멍하니 화면을 보고, 음악을 듣고, 영화는 왜 벌써 끝이고, 왜 벌써 새벽이 오고.
1.
자장영화 시리즈 두 번째 영화는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입니다.
<아가씨> 정말 많은 힘을 갖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개봉했을 때만 해도 저는 퀴어라는 개념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어요. 그때 접했다면 두 주인공의 성애적인 측면에만 집중해 보았을 거란 아찔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퀴어 영화라는 장르로 구분한다면 <아가씨>는 다른 작품들과 조금 차이를 보이는데요. 히데코와 숙희 두 여성의 사랑에 장애물을 설정하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퀴어 영화엔 어느 정도 정해진 플롯이 있죠. 성별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에 대한 혼란, 주변의 따가운 시선, 이성과 연애하며 자아를 부정하는 시기, 연인과의 헤어짐. 영화든 현실이든 퀴어 당사자에겐 반드시 유사한 형태의 장애물이 등장합니다.
<아가씨>는 그런 것들에 시간을 할애하지 않아요. 관객들로 하여금 설득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흔히 '정상'에서 벗어났다고 하면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더 많은 언어로 더 훌륭한 설득을 해야 하죠. 아러이러해서 괜찮고, 이러이러해서 다르지 않고, 이러이러해서 문제가 없다 따위의 말들.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그런데요,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백 마디의 설득보다 한 마디의 단언이 더 강하지 않을까?
저는 이걸 '선언의 힘'이라고 불러요. 그러니까 그냥 냅다 질러버리는 거예요. 아무 이유도 없이. 사실 이유를 붙인다는 건 그 크기만큼의 반격 역시 허용한다는 것이잖아요. 모든 생각엔 그 반대가 존재하니까요. 논리와 설득은 이 대화에서 당신을 향한 존중을 잊지 않고 최선의 가능성을 모색하겠다는 의지 아래서만 유효하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은 대상에겐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선언하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요. 아무 이유가 없는 것이 오히려 가장 강력한 법이니까.
<아가씨>는 선언합니다. 이 사랑에 어떤 사족도 붙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것. 요즘 말로 기존세의 선택입니다. 그럴 때 관객은 복잡한 인식을 뒤로하고 히데코와 숙희의 사랑에 몰입할 수 있게 되죠. 그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의 사랑이 너무나 평범하고 애틋하다는 것을. 다시 말하지만 선언은 모든 걸 평범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 것 같습니다. 무엇이든 자기가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설득 아닌 선언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무엇보다 저의 다짐입니다.
2.
퀴어의 사랑이 흉측하지 않다는 걸 더 촘촘히 증언하는 소재가 바로 음란서적인 것 같습니다. 흔히 퀴어를 이상성욕으로 일컬으며 비정상의 욕망이라고 비유해 왔죠. 하지만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욕망이 아가씨에 나타납니다. 조진웅 배우가 연기한 '코우즈키'입니다. 그는 감히 상상하기도 힘든 온갖 섹스 판타지를 담은 음란서적을 만들고 유통하는데요, 문제는 그 방식에 있습니다. 자기 아내와 조카에게 실감 나는 낭독과 행위를 강제한 것이에요. 자신과 음란서적을 구매하고자 하는 여러 남성 앞에서 말이죠.
특정한 섹스 판타지를 쉽게 비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타자에 대한 검열은 굉장히 신중해야 하는 문제고, 그 검열은 곧 자신을 향한 검열이 되기도 하니까요. 검열은 자칫하면 다양성을 소멸시키는 길로 빠질 수 있고 서로를 수만 가지 기준으로 재단하며 옥죄게 만들기도 하죠. 그것이 극대화된 곳이 대한민국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잠시 해봅니다. 어쨌든 제가 주목하고 싶은 건 유통 방식이 합의에 의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 강제로 자행되었다는 점입니다. 코우즈키와 그 무리의 욕망은 명백히 여성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실현됩니다. 히데코와 숙희의 욕망이 서로를 솟아나게 한다는 점에서 대조적이죠. 여느 안온한 사랑이 그러한 것처럼요.
3.
김민희 배우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이런 연기를 본 적 있었나, 아니 이게 과연 연기인 건지 묻게 되는 또 다른 차원의 경험을 한 느낌이었습니다. 나무에 매달린 김민희 배우가 김태리 배우를 내려다 보며 "숙희야, 난 네가 불쌍해"라고 말하는 장면은 정말 압도적이었어요.
일전에 타투를 받던 와중 타투이스트 분이 이런 말을 했어요. 스스로 완벽하다고 느낄 작품을 만든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고. 제가 김민희였다면 이후 다른 작품들이 쉽게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한다고 해도 정말 여유로운 마음으로 쉬엄쉬엄 할 것만 같아요. 마치 로또 1등에 세 번 정도 당첨된 후 소일거리 삼아 회사에 다니는 느낌이랄까? 예술인으로서의 김민희 배우가 가진 소회가 궁금해지는 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경지에 도달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나요? 그러니까 열정을 쏟고 싶은 대상이요. 산책, 음식, 사랑, 유머 무엇이든. 저는 요즘 삶에서 몰두할 수 있는 걸 발견하고 싶어요. 무엇이든 뜨뜻미지근한 정도로만 좋아하는 저로서는 참 힘든 일입니다. 그것 또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 텐데요, 스스로 믿고 납득하기엔 참 얕다고 느껴요. 얕은 마음을 어떻게 하면 사랑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요. 사랑한다는 건 뭘까요. 우선 저는 사랑하고 싶은 대상을 찾은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은 모두 취해서 사는 거야. 취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으니까.' <진격의 거인>에서도 비슷한 대사가 나왔던 걸로 기억해요. 취할 수 있는 걸 찾을 수 있다면 삶의 공허함을 상당 부분 지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시리즈도 그것의 연장선상이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사실 취하기 가장 쉬운 건 술이잖아요. 술 참 좋아합니다만, 당최 기억이 나지 않더라고요. 좋은 대화와 마음을 나눴음에도요. 술 말고도 취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고 있고 그러기 위해 다르게 움직이려 하고 있습니다. 똑같이 침대에 누워있지만 쇼츠가 아닌 영화를 고르는 것도 미묘한 변화라고 할 수 있겠죠. 그 미세한 손짓으로도 작은 파동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의미가 있는진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이렇게 몰두하고 있잖아요. 그 정도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얕아도 괜찮은 사랑을 체험하기에는요.
*모든 사진은 네이버 상 공식 스틸컷과 포스터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