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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해 Sep 07. 2024

[자장가 말고 자장영화] 3. 화양연화

* 수면 별점 ★★★★☆ 4/5


사랑이란 뭘까. 나는,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랑을 말하는가. 사랑으로 이름 지어진 우리의 서사는 대체 어디로 향하는 건지, 왜 다시 버려지는 건지.

 




1.

자장영화 세 번째 시리즈는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떠오르는 질문은 연 이랬습니다. '사랑이란 뭘까?' 


예술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 공교롭게도(?) 요즘 들어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서인지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연애를 하지 않는 이유는 아직 제대로 된 밥벌이를 하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제 자신이 사랑하기에 적합한 사람인지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아서이기도 해요. 내가 사랑과 어울리는 건지, 이 마음이 사랑이라 할 수 있긴 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저만의 정의가 없다는 의미겠지요.


사랑이란 말이 왠지 무색하게 <화양연화> 주요 소재는 불륜입니다. 차우와 첸 부인은 옆집에 살고 있는 이웃인데요, 그들의 배우자들끼리 불륜을 저지르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두 주인공이 함께하며 벌어지는 서사와 감정선이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이라고 볼 수 있어요.  


영화를 보고 다시 한번 느낀 건, 예술의 세계에선 제도권 밖의 사랑이 더 많은 관심을 받는다는 것이에요. 불륜은 이젠 클리셰에 가깝고, 오래도록 핍박받아 온 퀴어의 사랑 대표적인 예시죠. 예술이 일상에선 쉽사리 드러나지 못하는 욕망을 표현하고 충족시키는 역할을 하잖아요. 그러니까 예술이 영원히 사랑받는다는 건 결국 사람들 마음에도 현실의 제약에서 벗어난 욕망이 가득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합니다.


관련해서 니체의 말이 떠올랐어요. "내가 지금까지 이해하고 있는 철학, 내가 지금까지 실행하고 있는 철학은 (...) 삶의 낯설고 의문스러운 모든 것을, 이제껏 도덕에 의해 추방당해 왔던 모든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저는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선 도덕과 윤리에서 벗어나 자기 마음을 탐색해 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도덕과 윤리를 부정하는 것이라기보단 당위에서 벗어나 보자는 말과 비슷한 것 같아요. 자기 배우자의 불륜을 알고 차우와 첸 부인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건 분노와 슬픔을 표현하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피상적인 결혼 관계에서 벗어나 실질적으로 자기 마음이 어떤 모양인지 탐색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죠. 그래서인지 관객은 그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느껴요. 육체적인 접촉은 없지만 분명히 정신적인 애정이 느껴지는 것이지요.


대부분 불륜이라면 섹슈얼한 장면을 상상하지만 사실 차우 부인과 첸이 어떻게 사랑을 나눴는지 묘사되지 않기에 관객은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기 때문에 '실 그들도 차우와 첸 부인과 비슷한 모양의 관계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상이 들더라고정신적으로 서로의 결핍을 충족하는 관계라면 그 역시 불륜인가, 그건 얼마나 다르고 같은 것인지 쉽게 답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차우와 첸 부인이 만남을 거듭하며 자신의 배우자를 더 이해하게 되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로 차우가 그러더군요. "두 사람의 시작이 궁금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알겠다." 결국 차우도 첸 부인을 사랑하게 된 것이죠. 불륜을 저지른 사람들과 자신 역시 다르지 못하다는 걸 깨달은 것입니다.


저는 차우의 이 대사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느껴요. 그 말은 비윤리적인 상대와 내가 비슷하다는 걸, 내가 부덕하다는 걸 인정했기 때문에 뱉을 수 있는 말이니까요. 윤리라는 당위를 벗어날 용기를 내고서야 차우는 비로소 자기 마음을 헤아려볼 수 있었던 거죠. 그가 윤리만을 기준 삼았다면 아내를 향한 마음도, 첸 부인을 향한 마음도 뿌연 안개처럼 남아있지 않았을까요? 그것이 타당한지와 관계없이요. 



세간의 기준을 따르는 것만큼이나 그것에서 벗어난 마음을 발견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 지점에서 사랑은 서로의 원형을 회복시키려는 노력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어요. 사랑뿐만 아니라 우리의 동과 감정은 법, 제도, 문화 등에 영향을 받으며 형성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죠. 체제가 결코 다 담아내지 못하는 수많은 욕망들이 잠재해 있고, 역시 우리를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그것들이 전부 발산되면 질서 없는 혼란한 사회가 될 수 있겠지만(진짜 그럴지는 사실 아무도 모를 일이죠), 사랑하는 당사자끼리의 관계만 보자고요. 그 관계 안에서 서로의 충분한 합의가 있다면 못 할 건 무엇이 있을까요? 못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사랑은 새로운 합의와 규칙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의 규칙에 맞을 수도, 맞지 않을 수도 있는 각자의 마음을 터놓고 그것들을 규칙으로 유지되는 작은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 그렇게 나를 나에 가까워지게 만드는 것, 상대를 상대에 가까워지게 만드는 것. 저에게 사랑은 그렇게 느껴집니다. 그런 사랑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2.

앞서 차우는 자신과 불륜을 저지른 배우자가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습니다. 너와 내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중요한 열 된다는 걸 알았어요'악의 평범성'과 유사한 개념이겠지요. 너와 달리 나는 악하지 않다고 인식해 버리는 순간 할 수 있는 대화는 적어지는 것 같아요. 그 이후엔 온갖 비난과 자기 방어와 거리 두기만이 가득할 테니까요. 


언젠가 심리상담을 받을 때였어요. 저는 굉장히 당위 속에서 사는 사람이거든요. 도덕과 윤리를 무엇보다 중요시 생각하고, 내 감정보다 그것을 따르는 게 선이라고 여겨요. 그런 저와 이야기를 나누던 상담사분이 말하더군요. 책을 읽는 것 같다고. 당신이라는 사람과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잘 쓰여진 책 한 권을 보는 것 같다고. 당신의 생각은 어디 있냐고. 그리곤 덧붙였어요. '저 새끼 죽이고 싶어'라는 마음조차도 그 자체로는 가치평가를 할 수 없는 것이라고요.


혼란스러웠습니다. 상담사분의 말을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어요. 저는 그런 마음을 품는 것 자체를 죄라고 여겼거든요. 악한 마음이 제 안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그러면 저는 악인들과 다르지 않은 사람이 되니까요. 지금 보면 무의식중에 나는 선인이고 악인과 다르다는, 다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실제로도 악인과의 다름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책과 영상을 읽었고, 윤리적인 면모만을 취사선택해 나의 생각이라고 여겨왔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감수성이 풍부하나 막상 속은 텅 빈 사람. 그 결과가 이렇다니 분했지만, 부정할 수도 없는 사실이었죠.




이후 사람들과의 대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봤어요. 내가 동경했던 이들의 구리고 악한 면모를 족집게처럼 발견하려고 했습니다. 저에겐 충격적이게도, 아득히 윤리적이고 선하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그 못지않은 구겨진 마음을 갖고 있더군요. 저 새끼 죽이고 싶다는 마음은 물론이고요. 무엇보다 제 스스로도 말이죠. 그저 눈과 귀를 닫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점점 알 것 같더군요. 마음과 실천은 분명 다른 것이라고. 우리를 다르게 하는 건 마음이 아니라 마음을 실천으로 옮기는 의지라고요. 차우를 쉽사리 욕할 수 없는 이유도 자기 마음을 깨닫고 첸 부인과의 만남을 그만두면서 책임을 졌다는 데 있으니까요. 분명 다르지 않지만, 달랐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은 크게 다를 수 없는 것 같아요. 인간은 돌고 돌아도 결국 다 같은 족속에서 시작하는 게 아닐까요. 거대한 선인도, 악인도 결국 우리가 다 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르다는 차이점이 있고, 모두 다르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의 대화가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거기서 우리의 순수한 마음이 발아할 수 있지 않을까요. 거기서 우리의 사랑이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모든 사진은 네이버 상 공식 스틸컷과 포스터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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