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해 Aug 31. 2024

[자장가 말고 자장영화] 1. 남매의 여름밤

* 수면 별점 ★★★★★ 5/5 


잔잔한 플롯. 일상적인 이야기. 분명히 한 번은 겪었던, 그리고 여전히 겪고 있는 가족을 향한 감정. 여름의 쨍한 낮과 고요한 밤이 교차하는 걸 지켜보면 어느새 까무룩 잠이.






1. 

자장영화 시리즈 첫 번째 영화는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입니다. 


독립영화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너무 잘 알고 계실 영화죠. 모부의 이혼 후 아빠와 살고 있는 옥주, 동주 남매가 할아버지 집에서 여름방학을 보내는 이야기를 담았어요. 특정 사건보다 일상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플롯이 묘미입니다. 사춘기를 지나며 자기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중학생 옥주, 노는 게 제일 좋은 초등학생 동주, 신발을 팔며 생계를 이어가는 아빠가 등장하고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 과묵한 할아버지, 밝은데 왜인지 쓸쓸해 보이는 고모도 함께합니다.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저는 많은 감각이 느껴지더라고요. 내가 통과한 세계와 아직 통과하지 못한 세계 사이에서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도, 이해하지 못한다고도 느꼈습니다. 저는 특히 가족에 대해서 약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요상한 관계잖아요. 나랑 너무 안 맞는데, 마음 후련하게 달아나고 싶은데 다음 날만 되면 어김없이 같이 밥을 먹는 그런 사이. <남매의 여름밤>을 보면서도 역시 그 이상함이 느껴지더라고요. 좋은 것보다 싫은 게 많은 것 같고, 갖지 않아도 될 부담을 계속 느끼는 것 같고. 의문은 풀리지 않았지만 같이 있음으로써 가능해지는 감정과 사건들이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가족은 돌아갈 곳이 있다는 암시를 주는 존재 같다고 느꼈어요. 저는 저의 혈연 가족이 '집'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이곳보다 더 집 같은 집이 있을 거라 믿으면서 이상적인 관계에 계속 갈증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어딘가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옥주도 집을 편안한 공간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친구와의 관계나 애인과의 관계에서 더 자기다운 모습을 내보이고 새로운 자신을 실험해 보기도 하죠. 그런데 그럴 때마다 자꾸 실패합니다. 자기 의지대로 되는 건 별로 없고요, 제자리도 아니고 마이너스로 흘러가는 것만 같아요. 


옥주가 숱한 실패를 겪은 바깥 세계로부터 달아나는 공간은 항상 가족이 있는 집이었습니다. 가족이 특별한 위로를 주어서는 아니에요. 오히려 성질부리지 말라며 화를 돋우거나 가족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심하기도 하죠. 그런데 옥주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은 집밖에 없었고 결국 실패의 마무리는 가족이었다는 겁니다.


가족이 무슨 의미가 있냐 싶으면서도, 어쩌면 옥주가 마음껏 실패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걸 암묵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실패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고 완전히 소멸하는 느낌이 들잖아요. 그 느낌이란 사람을 참 취약하게 만들고요. 그때 나의 일부분을 꽉 붙잡아 두고 있는 가족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던 건 아닐까요. 


가족은 내가 무슨 일이 있든 무심하게 한 마디 하잖아요. 밥 먹자. 아무리 초라해져도, 아무리 빛이 나도 가족 안에서 우리는 여느 보통날의 내가 됩니다. 세간의 평가와 관계없이 원초적인 나로 담길 수 있는 곳. 다시 돌아와서 제로부터 시작할 수 있는 곳. 가족은 그런 의미가 아닐까요. 딱 그 정도의 의미여도 되지 않을까요. 



2.

옥주, 동주 남매 말고 다른 남매가 영화에 나오지요. 바로 아빠와 고모입니다. 저는 옥주의 예민함과 동주의 귀여움에 눈길이 쏠려 늦게 깨달았는데요, 뜬금없지만 동주 정말 귀엽습니다. 극의 모든 긴장은 동주를 거치면 느슨해져요. 존재 자체가 개연성으로 느껴지죠. 


동주는 깨끗한 동심의 결정체처럼 보여요. 저는 그 순수한 마음에서 영험함을 느끼곤 합니다. 동주의 대사 중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 있어요. "우리가 싸운 적이 있었나?" 지붕이 들썩일 정도로 치고받은 이후 멋쩍게 사과하는 옥주에게 동주는 저렇게 대답합니다. 정말 영험하지 않나요.


동주는 말 그대로 깨끗하게 잊은 겁니다. 잊어버리기로 결심했거나요.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해 생각과 감정을 분출했고 상대의 폭발적인 감정도 다 받아들였어요. 그렇게 남은 찌꺼기 없이 소화하고 또다시 자신의 하루를 재밌는 놀이로 가득 채웠죠. 정말 아득한 수준의 심신 단련이 아닐는지요. 동주의 마음은 후회의 대척점에 있으니까요. 어쩌면 종교적인 수련이나 명상 따위는 동주와 같은 어린 마음으로 회귀하기 위함이 아닐까요? 잡념으로 탁해진 마음을 태고의 상태로 정화하기 위한. 


그런 동주를 보고 있으면 삶은 선형적으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망각하고 편집하면서, 선이 아닌 무수한 점을 찍는 것이죠. 순간순간의 점을 만들면서 자기조차도 알 수 없는 궤적을 그려나가는 과정 자체가 삶의 흐름 아닐까요.



실제로도 삶은 선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옥주와 동주, 아빠와 고모. 음료수가 술로, 장난감이 담배로 바뀌었을 뿐 크고 작은 고민은 지겹도록 반복됩니다. 어른이 되어버렸으니 어른으로서의 행실과 책임을 다하지만 남매의 갈등도, 모부와의 갈등도, 개인으로서의 고민도 모두 비슷해요. 마치 같은 자리를 뱅글뱅글 돌고 있는 것 같죠.


그렇다면 삶의 방향은 나선 형태가 아닐까 상상할 수 있는 겁니다. 나아가는 것 같지만 비슷한 자리로 되돌아오고, 되돌아오는 것 같지만 나아가고.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의 정체감이 무섭지만은 않아요. 사실 반복되는 삶이 너무 허무해서 무섭거든요. 마치 앞으로의 삶을 미리 내다본 것만 같습니다. 반복되는 삶은 참 공허한 것 같지만 그 자체가 법칙이라면, 인간은 사실 그렇게 멀리까지 뻗어나갈 수 없다면 전혀 다른 삶의 모양을 선택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할아버지, 아빠고모, 옥주동주 삼대를 거쳐 반복되는 인간사는 정말 지겹고요, 조금 애틋합니다. 그래서 위로가 되어요. 특출난 주인공이 되지 않아도 삶은 무리 없이 흘러가는 것이니까요. 특정 사건 없이 잔잔한 일상을 변주하는 것. 그걸 연마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기 위해 많이 망각하고 부지런히 채우는 일상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지금 떠오르는 대상이 있다면 무엇이든 곁에 두어보세요. 우리의 삶을 소중히 채워줄지도 모르니까요.



*모든 사진은 네이버 상 공식 스틸컷과 포스터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01화 [자장가 말고 자장영화] 프롤로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