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값의 무게
나는 94년생 서울에 거주 중인 여자이다. 내가 어렸을 때, 30대가 되면 멋진 커리어우먼이 되어 '내 집', '내 자동차'를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 것이라고 상상했다. 여의도나 강남 주위의 회사를 다니며, 멋지게 거리를 거니는 나를 막연히 생각했다. 왜냐면 드라마나 소설 등 미디어에 나오는 커리어우먼들이 대부분 그랬으니까.
2024년 나는 30살이 되었지만, 내 어릴 적 상상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중소기업에 다니며, 40만 원 월세 집에 살고 장롱면허이다. 그리고 아직 5,000만 원도 없다. 내가 어렸을 때, 나와 나이가 같았던 우리 부모님을 생각하면 철도 없고 돈도 없다.
나는 세 자매 중 둘째로 태어나,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자신의 역할을 잘~하는 아이였다. 돌이켜보면 그게 내 생존전략이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는 그냥 열심히 하면 멋진 어른이 될 거라 막연히 생각했다. 어른이 된 지금 , 특히 회사 상사에게 불려 가는 날에는 ‘밥 벌어먹기 더럽게 힘들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물감 퍼지듯 빠르게 스며든다.
이제 나에게 어른의 기준은 어렸을 적 상상했던 멋진 커리어우먼이 아닌, 회사에 나가서 일을 하고 스스로 밥을 차려 먹고, 청소와 빨래도 척척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현실적으로 기준이 바뀌었다. 30살인 지금, 모든 일들이 사소해 보이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안다. 어른으로 '밥값 하는 건 힘들구나 ‘를 몸소 느끼고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食蟲이라는 글자를 칠판에 적고 설교를 하던 선생님이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직 철도 없고 경제력도 없는 청소년들은 부모님들을 고생시키는 식충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부모님과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고 부모님을 잘 돕는 '사람'이 되라고 했다. 질풍노도의 청소년들에게는 뻔한 훈화였지만, 그가 사람을 식충이라고 한 것, 아니 그냥 ‘나’를 식충으로 지칭하는 게 억울했다. 왜냐면 그 당시 나름 이유가 있었다. 나는 자칭 외고를 준비하는 우등생이었고, 부모님은 그런 나를 항상 응원해 주셨기 때문에 식충이라는 말은 나를 열받게 했다.
하지만 그 분노는 사춘기답게 오래가지 못해 기억저편으로 날아갔다.
시간이 흘러,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고시생이 되었다. 5급 고시생, 5급이라는 급수가 내 마음의 유일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주변 친구들은 사무관이 되거나, 취직을 해 '밥값을 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우울한 마음과 열등감이 들 때마다, 나는 큰 일을 할 사람이라고, 나비가 되기 위한 애벌레의 여정, 매미가 되기 위한 유충의 삶을 되뇌며, 나도 그 과정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2년간 낙방하였다. 누구에게 향해야 할지 모르는 분노와 우울만이 남아 있었다.
길었던 고시 공부를 마치고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취업준비를 시작했다. 부모님은 나에 대한 실망감을 말하지 않으셨지만, 분위기로 알 수 있었다. 부모님의 실망감을 상쇄하고자, 취준을 시작한 내 목표는 소위 '대기업'이라고 일컫는 기업들이었다. 하지만 그 대기업은 정말 ‘하늘에 별따기’였다. 그 별은 잡힐 것 같으면 다시 나에게서 멀어지는, 그런 우주 속에서 시간은 잘만 흘러갔다.
28살 겨울, 11월 즈음, 대기업 최종 면접을 보고 버스를 탄 뒤, 나는 버스 안에서 반짝이는 한강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정말 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답답함과 이미 무너지고 지친 나에 대한 믿음,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 겨울의 서늘한 바람과 맑은 하늘, 더럽게 반짝이는 한강이 있었다.
28살의 끝자락에 있던 그때, 카프카 변신에 나오는 '그레고르', 어렸을 때 들었던 '식충' 그리고 28살의 '나'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면접을 망쳐서 더 눈물이 났다. 고시 공부를 한다고, 대기업을 준비한다는 내가 '식충'이었다. 부모님의 고생으로 난 학자금도 없었고 매일 따뜻한 밥을 먹고 깨끗한 옷을 입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꼭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할 것 같아 감정이 복받쳐 올라 눈물이 났다. '사람 되는 게 이렇게 힘들구나'를 16살에는 몰랐지만, 28살에는 알게 되었다.
대기업에 붙지 못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 가족들은 나에게 사과나 음식물 따위를 던지거나 굶기진 않았다.
그 후, 나는 사람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사람으로 진화(?)했다. 2021년 마지막달인 12월을 남겨두고 회사라는 곳에 첫 발을 디뎠다. 회사에 처음 입사하고도 '밥값'을 해라, '1인분'을 해라 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밥값을 하는 사람'이라는 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경제력을 가진 어른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인 걸까?' 회사를 다녀보니, 또 그건 아닌 거 같다. 왜냐면 "걘 밥값을 못해~"라는 험담도 종종 듣기 때문에.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거리를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다들 밥값을 하는 어른들일까', '밥값은 살아있는 평생 해야 하는 건가' 등의 생각을 한다. 확실한 건 어른이 된 뒤, '밥값'의 무게가 생각보다 무겁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