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책임질 의무가 있다.
벌써 일요일 오후 9시를 넘어간 시간이다. 내일 회사 갈 준비를 하며 몸을 씻는다. 그러다가 말도 안 되는 퇴사 상상을 한다. 갑자기 내일 회사에 출근해서 퇴사하겠다고 말하는, 직장인들이 매일 하지만 실천하지는 않는 그런 상상말이다. 상상에 멈추지 않고 정말 진지하게, 당장 내일 관뒀을 때, 내가 모아둔 돈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토스뱅크를 켜서 계산해 본다.
월세, 발레레슨비, 식비, 휴대폰비, 전기세, 수도세 이런 거 저런 거 생각하다 보니, 역시 퇴사는 못할 거 같다. 나는 28살 12월, 회사에 입사하였다. 그렇게 ‘사람’이 되고자 했지만, 이 사람을 지속하는 데에 대한 의지는 길지 못했다.
돈이란 걸 스스로 벌기 전에는 나 자신을 기르는데, 그리고 나를 책임지는데 이렇게 많은 돈이 드는지 미처 몰랐다. 어른이란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거라고 하는데, 나는 그게 이렇게 힘든 건지 역설적이게 어른이 된 후에야 알게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는 꽤나 수익이 안나는 투자처였다. 망한 다마고치 혹은 프린세스메이커. 재수를 했지만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고 심지어 행정고시를 2년 넘게 준비하고 다시 취준을 1년 넘게 했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내가 하고 싶은 게 생겼다고 할 때마다 지원해 주셨다.
우리 부모님이 금수저 거나 건물주는 아니었다. 우리 엄마, 아빠도 할머니, 할아버지의 지지와 지원을 받으며 어른이 되었다. 우리 부모님은 직장을 다니다가 2000년 초 부동산투자 열풍으로 잘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모은 돈을 몽땅 부동산에 투자했다. 하지만 투자사기와 부동산 침체로 제대로 분양이 되지 않았고 말 그대로 30대 중후반에 백수가 되었다. 어머니는 삼촌이 하던 pc방을 싸게 인수해 pc방을 운영했고 아버지는 투자한 빌라를 분양하겠다는 명목하에 백수였다. 몇 번의 소송과 분양 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조부모를 찾아갔다. 새로운 사업을 하게, 돈을 빌려달라는 명목하에 찾아간 것이었다.
조부모와 외조부모는 1940년대 생으로 한국전쟁을 겪고 경기도 인근에 정착해 정직하게 땅을 일구고 땅에서 나는 작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분들이었다. 그분들이 아끼고 아껴 마련한 땅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달라는 것이 우리 부모님 요청이었다. 대학생 시절까지 나는 이 사실이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40대 초반에 자신의 부모에게 대출을 받아달라는 부모님 모습을 받아들이기란 어려운 것이다. 더군다나, 나에게 능력 있는 사람이 되라며, 능력주의에 대해 설교한 부모님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20대 후반 취직한 후 나는 부모님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인생과 돈이란 건 내가 계획한 대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또 [나의 이상하고 평범한 부동산가족]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며, 2000년대 부동산 투자 붐이 일었고 그 후, 부동산 침체. 그것이 한 개인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난 이제 30대가 되었지만 일요일 밤만 되면 퇴사선언을 상상하는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나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음을 알기에 상상에 그친다. 행복이 돈에서 나오지는 않지만, 돈이 있어야 최소의 행복이 만들어진다는 것에는 깊게 공감한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없는 고작 30대 초반인 나도 이런 마음인데, 40대 초반에 아이 셋이 있던 나의 부모님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부모님을 찾아갔을까 생각하면, 그들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이해되는 것이다. 그럼 나는 부모님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나에게 준 따뜻한 밥, 깨끗한 옷, 그리고 내가 누렸던 공부할 수 있던 시간들은 조부모에서부터 우리 부모님, 그리고 나에게 까지 내려온 사랑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내리사랑을 받은 나는 나를 잘 키우고 돌보고 사랑해야 한다. 나는 나를 책임져야 하는 어른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