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사달이 났어야 할 것 같은 일 앞에서는 당장의 분란보다 얼굴 맞대고 살아야 하는 불편함에 마음 한 켠 상자 하나를 마련해 두고 기억하기 싫은 것은 넣어 덮어버렸다. 생각보다 아주 쉽게. 매일같이 나쁜기억만 뒤엉켜 전체는 보지 못하고 눈앞의 분노에 사로잡혀버린 못난 나를 발견하는 것보다, 문득문득 열려버리고 마는 상자 하나 간수하는 것이 더 쉬웠을지도. 들썩이던 뚜껑도 들추어낼 일이 뜸하면 또 있던 것조차 모르게 고이 닫혀있곤 했다. 다른 삶의 고민들에 치여 그 쪽이 편하다고 여겼다.
엄마는 절대 잊지 못했겠지. 이제 한 다리 떨어져 있다고 쉽게도 눈감는건지, 어쩌면 조금은 나의 새 울타리를 지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는지. 그런 경험은 무섭다. 울타리의 경계가 달라지고 내 우선순위에 따라 최우선과 차선이 정확히 뒤바뀌는 것은.
나는 정말 그의 말대로 새 울타리가 생겨 그를 공격할 수 있었던걸까. 그 당시에 한 마디도 대들지 못했던 것은 정말 어린 아이의 무능감이 아니라 부모가 곧 내 세상이라는 계산이 들어있었을까. 그래서 그건 비겁하다는걸까. 나는 어떻게 했어야 했던걸까.
모두에게 가장 안정감있는 현재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또 참는 것을 선택하는 이의 희생 뒤에 사람 도리 한답시고 어른스러운 평화주의자를 자처하는 자들. 좋게좋게는 무슨. 거기엔 항상 누군가의 뼈를 깎는 인내가 따른다. 앞으로도 열려있을 건조하고 메마른 나의 마음 고생길을 응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