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도
요즘은 추적추적 비가 비처럼 내리는 날이 잘 없다. 뚜벅이일 때는 챙겨야 할 우산도, 인파에 밀쳐지는 것도, 옷이 젖는 것도 - 온 몸으로 고스란히 겪어야 하는 그 습도를 썩 기분좋게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내 몸을 덜 적시고 비를 느끼게 됐을 때 비는 가끔 내게 촉촉한 것이 되었고, 지금은 좍좍 퍼부어라-같은 말도 할 줄 알게 된, 비를 좀 반기는 사람이 되었다.
마르기만 하는 날씨에, 불길처럼 번지는 홧병에, 바작바작한 마음에도, 하루하루 생체시계에서 메말라가는 세포에도 물 한 모금이 필요해서다.
조금 자유로운 내게 이제 비 내리는 날은 파업이다. 학교 다니고 일 하면서 날이 무척 화창하면 이런 날 공부를, 일을 해야하다니! 하며 누군가는 옆에서 꼭 신세 한탄을 했다. 하지만 난 늘 반대인 것 같았다.
할 일은 해야하니 보통 날이 그런 날이고, 비가 내릴 때는 다 제쳐놓고 물을 먹어둬야 했다. 비 오는 날까지 보통이어서는 안 된다. 오늘은 낭만을 찾아야 한다. 오늘은 죄책감을 내려뒀다. 그렇게 비가 오면 차갑게 들뜬다.
말라가는 감수성은 그렇게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오늘 같은 날은 부르지 않아도 절로 찾아와주니, 달아나지 않게 그저 지켜봐줘야 한다. 이럴 때 고스란히 느껴둬야, 날뛰는 것들을 눌러둬야 또 보통 날을 살아낸다.
물을 먹으면 마음은 촉촉해지지만 촉촉함과 따뜻함은 꼭 같지만은 않아서 오늘은 조금 선선한 온도다. 들뜨지 않고 묵지근히 내리누르는 그런 온도다. 고소해서 좋아했던 세하도의 커피는 오늘 유난히 뒷맛이 시다. 인생은 한 가지 맛이 아니듯. 같은 음식도 때에 따라 맛이 다르듯.
비 오는 날은 비를 맞이하는 수 많은 다른 감정들이 들쑤셔지는 것처럼 삶을 바라보는 태도를 돌이켜보게 한다. 나는 잘 살고 있나. 비를 바라볼 줄도 아는가. 뒤처진 내 영혼을 기다려주고 있나.
남들이 볼 때 내가 달리지 않는다고 해서 꼭 내가 내 영혼을 잘 챙겨 함께 걷고 있는 건 아니었다. 되려 걸을 힘도 없는 영혼에 몸과 머리마저 분리되어 천방지축으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빚쟁이처럼 나를 독촉하고만 있었다. 그 셋 중 누가 '나'란 말인가. 이 놈이, 또 저 놈이 대답을 했다. 그들은 아직 합칠 기미가 안 보인다.
그대로 좀 내버려 두어도 괜찮다. 잊어버리고 쓰다 보면, 가출이 지겨워지면 또 돌아올게다. 너무 내달리지만 않으면, 제 자리 찾아 이끌리듯 또 오겠지. 비 오는 날은 내 영혼을 돌아봐주는 날일까.
토독.
토독.
비가 내 등을 토닥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