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을 씻고 오는 남자

37도 - 너의 사진에는 사랑이 담겨있다.

by 포인셋

사소하게 아이와 교육과 요리에 대해서도 글을 쓰지만 남편에 대한 글은 써본 적이 없다. 우리가 함께 해 온 시간은 17년이나 되었는데도. 참 마음을 표현하는 재주가 없는 내가 새삼 부끄러워서일까. 너로 인한 근심과 화가 그만큼 없었을 수도, 내 사랑은 너무 건조해서 이제 꽤 따뜻했던 그 때를 좀 잊어버렸을 수도 있겠다.


너는 하늘색 남자다. 그냥..떠올리자면 하늘색이다. (하늘색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다.) 빳빳하게 다린 하늘색 남방이 잘 어울리고, 하늘색처럼 믿음이 가는, 은은하고 편안하고 예리하고 한없이 봐도 질리지 않는.


남들에게 칭할 땐 절대로 '신랑'이라고 불러본 일이 없다. 내 개인적인 단어 취향때문이지만, 흔히 누군가 밖에서 "우리 신랑이~" 할 때는 조금 자랑조의 애정 섞인 단어로 들렸기 때문인데, 나는 자랑도, 애정도 그다지 내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난 오글거리는 건 절대 못 참는 이런 목석같은 인간이다. 그래서 넌 내게 '남편'이거나 차라리 '~한 남자'로 불린다. (그게 더 좋지 않나? 나는 남편이란 말이 더 믿음직하고 각진 느낌이라 좋다. 그리고 여전히 한 '남자'인 것도 나쁠 리 없다.)


연애할 때 늘 일찍나와 기다리는 나와, 늘 조금 늦는 너는 참 안 맞았다. 늦었다고 뭐라고도 못 하면서 오랜 기다림에 종일 툴툴댔던 내가 너도 조금 참아주기 힘들었겠다. 너는 그 때만 해도 늘 축구를 한 뒤 땀을 씻어내고 오느라 늦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늦는거였는데..어쩌면 알면서도 항상 씻고 나오는 그 정성이, 막 씻은 후의 그 하늘색 청량함이 좋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사진에 관심이 많은 너는 옛날엔 늘 아이폰을 고집했다. 지금은 붙박이장 속 상자에 박혀 있는 몇 대의 카메라가 조금 안쓰럽고 우습기도 하지만. 자리를 깔아주면 내내 어색한 표정만 짓는 나는 사진 찍히는 걸 싫어했다. 그런 나를 넌 참 이리저리 포즈를 주문해가며 줄기차게도 찍어줬다. 그 때는 이렇게 사실적으로 나온 못난 내가 뭐가 좋아서 그렇게 찍는건지 못마땅할 때가 많았고, 그게 엄청 로맨틱한 거라는 건 한참 나중에야 친구들이 알려줘서 알았다.


지금도 가끔 찍은 지 10년이 넘은 사진을 본다. 사진 보는 눈이 쥐톨만큼도 없던 내가, 신혼여행 가서 "난 널 잘 찍어줬는데 사진을 이렇게밖에 못 찍냐, 셔터만 누른다고 사진이 아니다" 라는 호통을 들은 뒤 조금의 신경을 써서 얻은 감각으로 보니, 네가 찍은 사진은 다 예뻤다. 잘 찍어서가 아니라, 그 때가 어려서가 아니라, 거기엔 남에겐 잘 보이지 않았던 웃음이 있어서였다. 회사 친구에게도 "너 이렇게 웃을 줄 알았어? 너 진짜 예쁘다."라는 말을 들었었다. 그 때 내 눈엔 눈은 사라지고 잇몸이 다 보이도록 깔깔거리고 웃고 있는 내가 보였다. 난 그렇게 보는 눈이 없었을까. 그래도 널 데려왔으니 됐다.


소박했지만 신혼이던 때까지도 우린 서로 웃긴 함께의 일상을 찍어댔고, 그래서 사진첩 속엔 내가 해준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 너, 술 취해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는 너, 팔을 걷어붙이고 집안일을 하는 너, 소파에 늘어져 잠을 자는 나, 괴상한 표정으로 널 대하는 나, 어깨동무를 한 우리가 있고, 모든 사진엔 잔잔한 행복이 묻어있다. 지금은 귀여움을 가득 장착하고 쑥쑥 자라나는 아이의 사진에 저멀리 밀려나버린 것이라도.


마음이 갈수록 조금 식게 느껴진 건, 우리에게 연인일 적과 같은 사랑의 표현보다 일상의 무게와 버팀이 더 큰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애써 나서서 표현하고 토닥여주지 않으면 그마저도 더 빨리 식어버릴 것임을 안다. 그러면서도 줄기차게 한 마디 꺼내준 네게 끝내 "들어가 자"라는 말로 쑥스러워 닫아버린 우물쭈물하는 이 입이 못된 것임을 나도 안다.


어쨌거나 애초에 대단한 물건은 아니긴 하지만 건조한 회색으로 꽁꽁 포장해버린 마음, 애써 내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애정, 내 속에 있는 건 그러니까 - 예쁜 상자나 바구니에 넣을 수도 있었겠지만 일부러 까만 비닐봉다리 같은 곳에 넣은 잘 익은 과일이다. 내내 예쁘게 같이 보고, 맡고, 즐길 수 있다면, 뭐 더 바랄 게 있을까.


이런 나라도 타박하지 않고 (검은 봉다리를 조금 서운해 할 때도 있는 것 같지만) 있는 그대로 지켜봐주는 너는 적어도 나에겐 사실은 참 잘 맞는 상대였음에 틀림없다.


'적어도 나에겐' 이란 말은 이기적인거겠지.


오늘도 너에게 34도만큼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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