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인셋 May 09. 2023

보통의 삶, 보통의 의지를 가진 당신에게

삶의 의미를 찾는 인간은 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란 말, 멀쩡히 열심히 잘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굳이 의미를 되새겨보지 않아도 될 얘기지만, 삶의 의미나 재미를 찾지 못한 누군가에겐 집착처럼 들릴 말. 오늘날처럼 지치고 힘든 일이 많을 때에는 찬성도 반대도 아닐, 뭐- 그렇게까지? 정도로 여겨질 말. 아마도 내가 그 쯤에 속할 것 같으니 내 멋대로 공감할 이들이 있을거라 믿으며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척 내 생각을 늘어놓는다.


어쩌면 살아가면서 닥친 선택에만 집중하느라 특별히 의미를 부여해본 적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내가 그저 살아가기 위해 하는 반복적인 행위들이나 그나마 생산적인 것 같은 일에 있어서도 갑자기 너무나 먼지처럼 작게 여겨지며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리 없을 것이라 여겨질 때, 이런 생각이 문득 찾아올 지 모른다. 나, 왜 살지. 온 생물체를 다 둘러보아도 존재의 의미를 찾는 건 인간 뿐, 다른 것들에도 그런 의미가 있었나.


사실 이승이 뭐가 그리 좋단 말인가. 이렇게 지지고, 볶고, 고민하고 번뇌하는 게 괴롭지 않단 말인가. 그 사이사이 작은 행복들로 의미를 찾기에 충분한가. 나라는 인간은 산다는 게 무엇인지 늘 궁금하기는 해도 살면서 그렇게까지 좋고, 신나고, 행복한, 그 자체로 축복이다 라는 정도의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다. 어린이일 때도 그랬다는 것은 조금쯤 그 때의 나를 만난다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픈 생각이 드는 부분이다.


엄청난 확률이라지만 내 입장에선 우연히 '나'로 태어난 것처럼, 이런저런 우연과 필연으로 엮인 갈림길들을 지나 당연하게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스러짐이 되는 것이 굉장히 덧없게 느껴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의미를 찾기 위해서인지 그 안의 하나하나인 끝 없는 경쟁을, 작은 목표들을 이루기 위해 달리고, 꿈을 꾸고, 가정을 꾸리며, 미래를 위한 준비를 끝없이 해댄다.


가족과 다투었을 때, 누군가와 싸우는 데도 이골이 날 때,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할 때, 노력이 좌절되었을 때, 남들과 비교될 때, 내가 아끼는 주변인들 사이에서 내가 작아지는 것 같다고 느낄 때, 재해와 질병과 법과 절차 같은 무언가에 고통받을 때, 누군가의 부재나 죽음을 마주할 때, 세상에 이렇게 불운과, 나쁜 일과, 벽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때, 혹은 그런 일이 주변에서 연달아 일어날 때. 삶이 무언지 알아가도록 삶이 쌓이고 있는데도 되려 그 의미도, 어떻게 살아야 할 지도 점점 더 모르겠다면 이상한걸까.


불쑥 나쁜 것이 튀어나오고, 그런 시련이 두려워 때로 웃기도 겁이 나는 것이 삶. 내가 배우고 되고 싶은 것도 실은 거짓일까 두렵고, 꽤 좋은 어른을 만나도 그들의 결과나 굴곡이 역시나 그다지 완벽하다거나 고르지만은 않았던 것에 실망한다면 내 욕심이 과한걸까. 나이 60이 넘은 어떤 분과는 세상 얘기가 너무 잘 통해서 내 속은 내 나이가 아닐까 싶을 때, 어떤 분은 저 연세에도 저렇구나 싶어서 나의 그 나이가 두려워질 때, 앞으로 남은 삶도 별다를 것 없을 번뇌, 더 살아봐도 대단한 것이 없을테고, 겪어야 할 것들에 벌써부터 넌더리가 난다면 피하고만 싶은 난 용기가 없는걸까. 그 과정이 바로 삶이야 라고 내 속에서 걸어오는 말을 부인하고 싶은걸까.


적당히 배우고 적당히 나를 건사하며 특별하지 않았던 시련들을 지나 딱 그만큼의 행복을 느끼고 사는 내겐 엄청난 열망이 있어본 적도 없고, 그다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사는만큼 모든 사물이나 사람에도 특별하게 큰 애정을 느끼지 못해서 미련조차 특별하질 못한걸까. 코 앞에 특별한 무언가가 닥쳐봐야 알게 될까. 그렇다고 삶에 '대충'이란 태도로 일관했냐 하면 그렇지도 못했다. 오히려 의미를 찾을 데가 없어 내 기준에 가장 간편하고 골몰할 만한 것들에 파묻혀 많은 시간을 쏟았다. 너무 적당해서 열심히도, 대충도 못할 나라서, 그래서 나만의 세계가 구축되었는지도 모른다.


보통으로 사는 것도 어렵다고 하는 요즘이지만, 그 어려우면서도 지극히 눈에 띄지 않는 보통에서는 무엇을 찾아야 할 지. 이렇게 먼지 낀, 부옇고 미지근한 햇볕이 내리쬐지도 않고 그저 존재하는 것 같은 요즘의 온도는 딱 나의 삶 같다. 어르신들이 흔히 "죽지 못해 산다"고 하는 말은 그래도 좀 더 치열한 느낌인 것 같고, 그럼 그 만큼도 못 될 나 같은 이에겐 죽는 것도 사는 것의 의미도 보통이기만 한 걸까. 삶의 보람은 옛날 그 어느 때처럼 몸을 혹사시키는 노동이라도 있어야 찾을 수 있는걸까.


그렇다면 당신은 삶에 미련이 아주 없는건가. 그건 아니고. 스스로의 삶을 놓는 것이 인간 사회에서 보편적으로든 신념상으로든 죄악처럼, 무책임의 대명사로, 잘 못 내린 선택으로 고정 된 가운데 잘 해봐야 동정의 감정을 불러 일으킬 종류의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용기보다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쪽인 나지만 살면서는 간혹 이런 얘기를 하기도 한다. 그럼 반대로는, 절실하게 살고 싶나. 그건 잘 모르겠다. 안에서부터 아파오는 것에는 무뎌서 참고 견디는 데 익숙하고 오히려 선고가 내려지는 것에 겁을 먹는 나, 그러면서도 살갗의 찧고, 긁히고, 베이는 것에는 한참 두려워하고 성을 내며 아파하는 나는 사는 것도 딱 그런 모습으로 산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라도, 만약 사자가 내게 찾아와 지금이 갈 때요, 하며 가자고 해도 조금 주춤댈 뿐, 그래요? 어쩔 수 없죠..하고 따라 나설 것 같은 느낌이라면 너무 무서울까. 누구에게나 시작처럼 마지막이 있지 않나. 사는 내내 이 정도면 괜찮지 하고 사는 것처럼, 나보다 훨씬 더 억울한 죽음도 많겠지- 하며. 다른 생물들처럼 너무 큰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섭리대로 있다가 가고 싶은 나는 의미를 찾는 이들 사이에서 좀 힘들고, 우리네 삶에 소소한 기쁨보다 너무 큰 슬픔들이 많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좀 가엾다.


사람에겐 저마다의 주어진 운명이 있다. 운명이란 말은 여러가지 모습이라 내 삶에 이미 정해진 것, 내가 태어난 생김과 자리잡은 곳, 내가 떠나갈 나이와 모습을 포함할 수도 있고, 때로 그 말은 멋지기도 한 것이라 내가 살며 관계를 맺은 이들과 만난 타이밍, 내게 다가올 행운, 삶에서 사랑할 것들도 들어있다. 내가 생긴대로 쌓아갈 것들 중에 유달리 우연한 계기로 인해 꽂히고 만 것, 뜬금없이 비뚤게 한 선택 같은 것으로 새로 만들어갈 것도 꽤 있을 것이다. 나는 그 흐름에 따르는 사람, 엇나갈 일은 그다지 못 하도록 생겨먹은 사람이라면 가끔은 무엇을 탓해야 하나, 생각한다.


아무 색도 없이 이 세상에 왔거나, 색을 잃었거나 해서 나는 색을 좀 칠하고 싶지만 지금은 아직도 무엇을 칠해야 할 지, 마구 칠하다 그림을 망치지는 않을지 망설이는 모양새다. 보통의 우리 삶엔 이런 생각도 옳고 그름이 없다. 정해진 것도 없다. 아직 어딘가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을 뿐. 결국 그런 마음도 욕심까진 아니라도, 더 나은 그림을 완성하고픈 생각에서 오는데 그마저도 마감은 다가오고, 완성은 해야겠고, 정하지는 못해서 무채색으로 기어이 한 꺼풀 칠해버린 나는 언제쯤 내 그림의 윤곽이라도 잡을 수 있을까.



* 내내 하는 생각이 아닌 머릿속에 떠다니던 검정을 모아 쓴 글로 누군가에게 걱정을 끼쳤거나 마음 속에 괜히 그늘만을 드리웠다면 조금 반성해야겠다. 누구나 잠시 그럴 때가 있듯, 내 삶은 온통 검정은 아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논설문을 엄청 썼으니까 알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