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소아과에 갔다. 진료실을 나와서 흥분한 아이를 진정시키려고 하는데 갑자기 아이가 내 다리 뒤로 숨었다. 생전 처음 보는 겁먹은 표정이었다. 아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는데 검은 피부에 수염이 많고 프레디 머큐리를 닮은 외국인이 서 있었다. 인종이 다른 사람을 가까이서 많이 볼 기회가 없었던 터라 낯설어서 공포를 느낀 것 같았다. 아이가 너무 대놓고 화들짝 놀라는 바람에 내가 민망해졌다. 애가 낯설어서 놀랐나 보다, 불쾌했다면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그분은 정말 유창한 한국어로 양쪽 팔을 흔들며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다. 자기도 아기가 아파서 왔는데, 요즘 애들 사이에 감기 바이러스가 아주 강력한 게 퍼진 것 같다고 큰일이라고 하소연을 했다. 우리는 잠시 서서 애들이 아프면 얼마나 불쌍한지 대화를 나누고 모든 애들이 안 아펐으면 좋겠다는 부모다운 기원으로 짧은 만남을 마무리 지었다.
약국에 처방전을 내고 약을 기다리면서 아이에게 물었다.
"아까 그 삼촌 보고 왜 그렇게 놀랐어? "
"무서웠어 나쁜 사람 같았어"
아... 나쁜 사람이라니..
학창 시절엔 윤리 책에 나오는 인간의 타고난 품성 중 성무 성악설이 맞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이끄는 대로 선이 되고 악이 되는 것이라 여겼다. 아이를 낳고 나서는 셋다 틀렸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다만 엄청나게 자기중심적일 뿐이다. 자기중심적이라는 건 단순히 이기적이란 말도 아니다. 자기와 다른 것에 대하는 본능적인 경계심이 있다. 상대적으로 자기와 동질감 느끼는 대상에 대해서는 이타심으로 발전하기도 하는 거 같다. 경계심은 배타심이 되고 배타성은 혐오가 되고 혐오는 필연적으로 확장된다. 이타심이 인류애가 되는 과정보다 훨씬 더 빠르고 쉽고 보편적이다.
아이는 자기와 다른 사람을 거의 즉각적으로 나쁜 사람으로 분류했다. 사실 부모로서 이 정도 나이의 아이에겐 타인에 대한 믿음보다 경계심을 더 장려해야 할 입장이지만 그 기준과 경계를 어떤 식으로 알려줘야 하는 건지 어렵다.
"사람은 딱 봐서는 착한지 나쁜지 알 수 없어. 피부색은 누구나 달라 엄마랑 **이도 완전히 똑같은 색은 아니잖아. 아까 아저씨처럼 좀 더 어두운 사람도 있고 또 **이보다 밝은 사람도 있는데 피부색은 나쁜지 착한지랑 아무 관계도 없어."라고 말했다. 사실 아이에게 뭔가를 알려주려고 할 때마다 느끼는 건데, 31개월짜리 아이 앞에서 내 언어는 너무나 무기력하다는 거다. 과연 얘가 내 말을 알아들었을까? 아님 자기가 내뱉는 말은 알고 내뱉는 건가 그냥 의성어 같은 걸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알든 모르든, 말을 안 할 수는 없어서 한다. 가끔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인 거 같기도 하다.
아이를 건강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 신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그렇다. 요즘 같은 혐오의 시대엔 더욱 그렇다. 결국 약자에게 향하는 혐오의 언어에 장단을 맞추는 인간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전에 자식 잃은 부모들이 단식 투쟁하는 앞에서 피자와 치킨을 시켜먹으며 해맑게 웃고 있던 청년들의 모습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도저히 머릿속에서 떠나지가 않는다. 최근 n번방 사건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진짜 그따위로 키우고 싶지 않다. 혐오스러운 인간으로 키우고 싶지도, 평등을 두려워하는 머저리 같은 인간으로도 키우고 싶지 않다. 31개월짜리를 앞에 두고 이런 쓰레기 같은 표본들을 자꾸 떠올리며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죄책감이 들지만 난 정말 진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