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을 살아가는 시간 (서평 아니고 독후감)
구병모-파과
읽고 나면 바로 다시 읽고 싶은 책이 있고, 언젠가 시간이 지나 다시 읽어봐야겠다 생각하게 되는 책이 있다. 전자는 책이 주는 여운 때문이고 후자는 내 이해의 폭이 아직 작품에 미치지 못함이다. 내가 이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확신. 지금도 좋지만 나중에 읽으면 다를 거 같다는 예감 말이다. 인간은 본인이 겪지 못한 일에도 탁월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존재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 세상엔 직접 겪지 않고는 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파편들이 존재한다. 글쎄 그런 걸 모아 '깊이'라고 부르는 건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내가 노년이 되어 이 책을 다시 읽게 되면 어떤 느낌일까. 지나온 삶을 회고하며'깊이'를 실감하게 하는 책일까 아님 겪어보니 대수롭지 않은 그저 그런 내용으로 느껴질까?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에 가까운 노화와 쇠잔의 감정들. 하지만 그때까지 살아남는다면 반드시 느껴야 할 감정의 여운이 쓸쓸하게 남아 있다. 쓸쓸이라니. 먼발치에서 보면 모든 것은 어느 정도 미화되기 마련이니까.
여성, 노인, 킬러. 어느 하나 서로 어울리는 말이 없다. 세 단어는 아이들이 무작위로 뽑은 낱말카드처럼 아무 연관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굳이 유사점을 찾자면 세 단어 모두 제각각의 편견으로 똘똘 뭉쳐 원래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보기조차 어렵다는 것 정도다. 이 동떨어진 세 단어를 하나로 뭉쳐놓은 주인공의 이름은'조각'이다.
한 때, '손톱'으로도 불렸던 유능한 킬러 조각이 냉장고에 눌어붙은 썩은 복숭아 조각을 손톱으로 떼며 흐느끼는 장면이 이 소설의 정수라면, 지킬 것을 지키지 못해 지킬 것을 만들지 않고 사는 노년의 조각이 무언가를 지키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게 이 소설의 백미다.
스토리의 짜임새와 개연성, 혹은 그 구성의 탁월함으로 독자의 마음을 붙드는 소설은 아니다(물론 그게 나쁘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보다 작가의 섬세한 관찰력과 거기에서 나오는 사유의 깊이. 문장의 긴 호흡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 위해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 수고를 곁들이지 않아도 되는 문장력과 흡인력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조각은 나에게 묻는다. 내가 당신의 목에 비수를 꽂기 전에 나를 알아볼 수 있겠느냐고. "혐오스럽지도 이색적이지도 않아서 타인들이 원하는 기준치-실제 평균치와는 무관한-에 들어맞아 어떤 이목도 끌지 않는 그녀"를. "항목이 분류되지 않은 폐지처럼 인식에서 치워 버리"거나 "인식 자체를 처음부터 하지 못하"지는 않을 것인지.
나는 나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보고 사람을 분류하고 판단하는지. 지나온 모든 나이들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앞으로 지나게 될 나이들을 감히 짐작이나 하고 있는 것인지. 작년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깨달은 사실이 있다. 나는 할머니를 사랑했지만 인간적으로 궁금해한 적이 없다는 것을. 할머니는 그냥 할머니였을 뿐, 나는 굳이 할머니의 역사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할머니 역시 나의 이해를 구한 일이 없다. 이상한 일이다. 사랑의 기본은 궁금함이 아니던가. 지금에 와서야 내가 할머니를 사랑한 방식에 뭔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젊은이가 노인을 대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젊은이가 그렇게 늙어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해하려 하지 않고 결국은 이해받지 못할 것이다. 사랑은 대물림 되고 학습되는 것이라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