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입이든 방문이든 간에

정혁용-침입자들

by 기묘염

심상한 대화 한 줄에서도 사유의 깊이가 엿보이는 소설이 있다. 작정한 듯 사상을 전시하지 않아도 가벼운 듯 철학적인 소설이 있다. 이 책은 서사보다는 깊이다. 깊이 있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읽히는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적 재능이다. 쉽게 읽힌다고 해서 가벼운 것은 아니고 어렵게 읽힌다고 해서 심오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본인의 사유를 전달하는 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일상적인 언어들로 자신의 삶의 철학을 풀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전달의 방식이야말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재능이 드러나는 가장 중요한 특성이다. 평소 삶을 대하는 작가의 철학이 자연스럽게 글에 녹아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인간을 대하는 그의 평등함이다. '행운동'이라고 불리는 택배기사인 주인공은 적당히 무심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다정한 시선을 가진 사람이다. 사람 위에 사람 없다는 삶의 태도에는 고결한 우아함이 있다. 그걸 내세우거나 본인을 과대평가하지 않는 겸손한 성품이 매력적인 캐릭터다. 주인공의 숨겨진 과거나 직업의 특수성 같은 부수적인 설정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택배를 하면서 만나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에 대한 나름의 시선을 보여주는 책이다. 편견 없는 시선과 줏대 있는 태도 , 무엇보다 지적인 농담을 할 줄 아는 것이 이 책의 관전 포인트다.


주인공의 인생에 불쑥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 모든 사람들을 소설의 제목에서는 '침입자들'이라고 표현했지만, 결국 주인공과 이 침입자들은 서로의 상실을 치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스스로의 잘린 꼬리를 자라게 하는 도마뱀이 아니기 때문이다. 침입자들은 오래 머무르지 않고 다시 자신의 외딴 방으로 돌아가겠지만,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는 그 모든 과정들이 없다면 주인공은 결코 틀어박힌 컨테이너에서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또 하나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것은 직업을 대하는 그의 태도다. 일을 대하는 인간의 고결한 자세라고나 할까. 노동에 대한 그의 관점은 마치 내 마음속에 한번 들어갔다 나온 것 같았다. 그래! 내가 하려던 말이 바로 그 말이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이유. 내 말이 곧 그 말이라는 공감의 기쁨. 바로 그것을 느끼게 한 소설이었다.


--부코스키는 팩토텀에서 이렇게 썼다.

'도대체 어떤 빌어먹을 인간이 자명종 소리에 새벽 여서시 반에 깨어나 침대에서 뛰처나오고, 옷을 입고 , 이를 닦고, 머리를 빗고 본질적으로 누군가에게 더 많은 돈을 벌게 해주는 장소로 가기 위해 교통지옥과 싸우고,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해야 하는 그런 삶을 기꺼이 받아들인단 말인가?'

일어날 침대도, 이를 닦고 빗질할 시간도 없지만,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내가 동의한다고 해서 그의 말이 진리는 아니며, 조 따거와는 일에 대한 견해가 서로 다를 뿐이다.


이 문장의 모든 단어가 마음에 들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하지만 내가 동의한다 해서 나의 말이 진리는 아니며, 조 따거와는 일에 대한 견해가 다를 뿐이다- 바로 이 부분이다. 본인의 견해가 분명하지만 타인의 견해를 인정하는 태도가 소설 전반에 깔려 있는 이 주인공의 인생 모토다.


일반적인 노동 착취가 육체적 피로, 여가시간 단축, 생활고의 악순환, 감정과 사고의 피폐라면 감정노동은 그나마 남아있던 피폐해진 사람들의 정신세계까지 완전히 파괴한다. 이렇게 피폐해진 사람들이 부모와 자식, 상사와 부하, 고객과 손님, 주인과 알바 등으로 만났을 때 , 서로를 할퀴지 못해 안달이 나는 것이다.


(내 말이 그 말이라고 내가 말했던가?? )


사람이 쓸쓸한 얼굴로 얘기할 때는 들어야 한다. 아무리 아프고 서러운 얘기라도 세상사에서는 흔한 얘기일 테지만, 그 사람에게는 유일한 얘기일 거니까. 그게 예의다. 그런 장점 한 두 개 정도는 가지고 살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단점만 185,403개를 가지고 있는 인간은 가끔이나마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다.


... 그렇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내가 이 소설을 좋아하게 된 관점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내가 독후감을 쓰는 기준은, 그저 내가 읽어서 좋은 책이면 된다. 책을 읽다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책도 있고, 뭘 읽었는지 모르겠는 책도 있고, 사실상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책도 적잖이 만나게 되지만, 굳이 그런 책들에 대해서 비난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단순히 개인적인 나의 감상일 뿐이다. 나에게 별로인 작품이라고 해서 타인에게도 그러리라는 법이 없고, 나에게 최고의 작품도 타인에게는 졸작일 뿐일 수도 있다. 작가가 인용했던 말처럼 예술은 삶을 보다 견딜 수 있게 만드는 인간적인 방법이다. 잘하건 못하건 예술은 진짜 인간으로 성장하게 만드는 길 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노력과 성장의 과정일뿐이라면 내가 굳이 잘잘못을 따지고 비판하고 비난할 이유가 없다. 한 권의 책은 누군가의 시간과 노력의 결실이며 모든 인간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책들도 나름대로 존재할 권리가 있다.

나는 오늘도 좋은 책을 한 권 읽었고, 그 감상을 서평이 아닌 독후감으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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