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준이 없이 할머니 혼자 그리는 제주이야기/동쪽에서 서쪽으로
자주 오갔던 제주인데 하준이와 함께 하면서 제주의 기억이 리셋 됐나 봐요. 제주의 모든 곳이 처음 보는 그림이에요. 유치원 한 달 결석이 허락이 안 돼 부득이하게 유치원에 다녀오기로 하면서 삼 일간 하준이 없는 날들을 지내게 됐어요.
잠시 할미는 너를 그리워하면서 어른의 여행을 할 참이야. 꽃 진다고 사랑이 지는 게 아니란다. 물과 공기를 머금어야 생명이 자라는 걸 거문오름에서 봤지? 그리워하는 마음도 쌓아두면 더욱 단단해지는 법이니까 잘 지내다가 금세 또 보자!
육아해방된 할미와 노동해방된 할아버지를 위한 첫 일정은 애월바다가 보이는 갤러리 카페 슬로보트에서 멍 때리며 커피 마시기. 드립커피와 보트를 연상시키는 카페엔 재즈선율에 맞춰 고요가 흐르는데 네가 없는 제주는 활기를 잃어버린 듯해.
띠부실을 삼 일간 맡길 테니 잘 부탁한다고 떠난 하준이도 할미랑 할아버지가 나보고 싶어서 울고 있지 않을까, 걱정이랍니다. 너와 함께 걷는 길 어디든 다정한 온도로 따뜻했는데 오늘은 나뭇가지 끝에 서성이는 햇빛 한 가닥 한가닥마다 네가 어디 있냐 묻는 듯 쓸쓸해.
오늘의 런치타임은 미리 예약해 놓은 불특정식당이에요. 하준이랑 삼달리를 지날 때마다 무척 궁금했던 식당이거든요. 조용한 동네라 흔한 귤창고인 줄 알았는데 '불특정'이란 명찰을 차고 있어서 신박하다 싶어 들어섰다가 예약제이며 노키즈 존이라 하여 입장거부 당했던 식당입니다. 맛없기만 해 봐라, 꼬투리 잡을 맘 단단히 먹고 들어서자마자 그만 홀려버렸어요.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운영되는 식당이니 셰프 맘대로 엄선한 재료를 예술적이면서 감각적으로 선보인다는 거지요. 네 명의 젊은 남자셰프가 일사불란하게 눈앞에서 요리를 만들어 친절한 설명과 덧붙여 권하는 콘셉트예요. 불특정의 사람들이 특정한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는 분위기만으로도 맛이 없을 수가 없죠. 키즈 존이어서 하준이의 입장허락이 돼 자리에 함께했다면? 자기 말만 하는 깍쟁이 같은 이미지라 또또가잔 말을 안 했을 테니 알아서 노키즈존이었던 거지요.
간밤에 옆집에서 샤워를 하는구나 했더니 비가 쏟아져내렸던 거였어요. 새벽에 그쳤다가 아침엔 올똥말똥 약 올리는 하늘이라지만 제주는 어디든 놀 거리 무진장입니다.
비올똥에서 말똥으로 정지된 틈에 신성한 숲 사려니숲에 슬금슬금 들어섭니다. 사려니숲길과 닿아있는 삼월의 붉은오름은 야생화꽃밭이에요. 봄처녀 복수초부터 별처럼 작고 어여쁜 개별꽃, 현호색, 산자고 등 발아래가 온통 꽃 천지니 오르는 걸음 내내 조심스러워요. 어디 꽃밭만 있겠냐고요. 초록머리카락에 커다란 흰꽃핀 주러렁 매달고 어여쁨 뽐낼 산딸나무와 때죽나무, 참식나무, 까마귀베개, 성산, 뽕뽕거리는 꾸지뽕, 산뽕나무 등 다채로운 나무들이 바람과 만들어내는 절묘한 화음에 산오름길도 신이 납니다. 이만 걸음을 훌쩍 넘겼는데도 아플 틈이 없어요. 왜? 꽃침 제대로 맞았잖아요.
그런데 꽃 비 내리는 가시리벚꽃길에 너도 함께 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