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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순 Jan 23. 2023

낚이는 타입

 명절이 근접해서인지 차가 많이 밀렸단다. 파주 교하에서 송파까지 두 시간 걸려 왔다며 남편은 서둘러 겉옷을 벗더니 "나 오늘 사기당한 거 같아."라며말을 꺼낸다.

"응! 무슨 소리야?"

 전철 옆자리에 앉았던 90은 되어 보이는 어떤 신사(?)에게 지갑에 있던 돈 10만 원을 주고 오게 된 사연이었다.

 명절 전 마지막 일을 하러 아침에 집을 나선 시간은 6시. 좀 의아했다. 사기를 당하는 데 특정 시간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이른 아침 문산행 전철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한 달 알바비 중 생활비로 일부 내놓고 명절이라며 누나에게 용돈까지 보내고 수중에 남은 돈이 거의 없을 텐데. 주머니를 다 털렸다는 소린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냥 낚인 듯했다. 전직 강릉 시장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핸드폰과 지갑을 잃어버려 아침도 굶었으니 돈 좀 빌려달라고 해 돈을 주었단다.

 남을 속이려는 사람이 남루한 옷을 입는 경우는 거의 없는 데다 말을 지어내는 것도 그럴듯하다는 건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이야기를 다 듣기도 전에 헛웃음이 나왔다.

 원래 잘 낚이는 사람은 나라고 생각했는데... 일단 좋은 말로 남편을 위로해야 하는데~.

  최근 읽은 책에 나온 말을 했다. 전라도 사투리를 표준어로 번역하면 이렇다.

 "사람이 오죽하면 그랬겠냐?"(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나는 '사람이 되어 왜 그러냐?'는 말을 참 많이 써왔다. 생각해 보니 남 탓에 원망이 주로 담겨 있었다. 물론 누군가에게 속았다고 생각하면 기분 상하지 않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미 되찾을 길 없는 돈에 미련을 두어야 속만 상하지 않을까.

 남편의 하루 일당은 10만 원이다. 그래도 일감이 있으면 일을 하러 나선다. 그날처럼 거리가 멀면 5시에 일어나 새벽밥을 스스로 챙겨 먹고 6시에 출발해야 일을 시작하는 8시 30분에 맞출 수 있다. 추운 길을 나서는 게 마음에 걸려 겨울은 체력 보강을 위해 쉬는 건 어떠냐고 말려 보기도 했다. 파주는 웬만하면 차를 끌고 다니라고도 했다. 운전 시간이 길어지면 졸려서 힘들어 하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남편은 노는 것도 좋지만 일이 힘들지 않은 데다 3시면 마칠 수 있어 좋다며 일을 하러 간다. 추운 날에도 전철을 몇 번이나 갈아타고서. - 며칠 같은 장소에서 일을 하게 되면 가는 날 차를 가져가고 일을 마치는 날 차를 가져온다. 장비와 작업복 등 때문에 차가 필요하다.-


 나이가 들어도 용돈을 벌어 쓰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몸을 움직이는 것도 옳은 일이다. 원거리를 오가는 게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70대에도 일을 해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리지 않는 건 아니다.

 남편은 내가 공적 연금을 받기 때문에 노령 연금 등 어떤 혜택도 받을 수 없다. 그 나이 또래 많은 사람들처럼 국민연금도 없다. 나는 남편에게 나이 많은 경비 노동자 분들이나 청소 용역을 하시는 분들에 대해 다양한 사연들을 전해 들었다. 전에는 그분들을 위해 국가 차원의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분들의 사고가 너무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나이 들었어도 자기 하는 일에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신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떻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냥 5만 원만 주지 뭐 굳이 10만 원까지???" 했더니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5만 원만 더 빌려달라고 자꾸 그러더라. 돈 갚는 건 됐다는데도 굳이 따라 내리면서 내일 100만 원 보내준다고 내 전화번호를 휴지에 적어가던데." - 돈을 갚겠다는 연락은 없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과거 남편은 인쇄와 출판을 겸한 자영업(내가 쓰는 글에 대해 문맥이 이상하다는 태클을 제일 많이 건다. 요즘은 아예 안 보여준다)을 했었다. 경리 업무를 보던 아가씨들이 나에게 "사장님. 집에서도 그렇게 무섭게 구세요?" 하며 물었었다. 일단 인상부터 남들에게 호락호락하게 보이는 타입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 별명이 대감이었다면 어떤 인상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거기다 경상도 억양에 목소리도 크다.

 나야 같이 살았으니 겉만 강해 보이지 속이 물러터졌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부부 싸움이 나도 결국 조곤조곤 말하는 나에게 대부분 져 준다. 목소리만 클 뿐이지 사실 속이 여린 남자라는 걸 알기 때문에 나야 목소리가 커져도 흥! 하고 만다.


 사기를 당하는 피해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약해 보여서는 아닐 것이다. 누군가의 하루 일당을 갈취(?)해 간 사람이 잘못한 건 분명하다. 다만 그런 피해를 당했다고 남편이 마음의 상처를 받기 원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궁금하다. 도대체 언제부터 남편도 낚이는 사람이 되었을까? 그 누군가에게 쉬워 보이는 인상으로 바뀐 건 좋은 변화일까? 이런저런 의문이 꼬리를 문다.


 "하루 일당으로 지갑 잃어버리고 아침도 못 먹었다는 사람 밥 먹이고 차비드렸다고 생각해."

 "그러엄~.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잊어버리려고. 다른 데서 좋은 일 많이 생기겠지."

 이렇게 둘이 쿵작을 맞춰 마무리했다.

청설모를 쫓아 나무에 올라갔다 내려온 녀석에게 나도 모르게 캔을 꺼내 줬다.

 남편에 비해 나는 확실히 잘 낚이는 타입이다. 도를 아십니까에 낚인 적도 있고 길을 가다 분양하는 오피스텔 모델하우스에 끌려 들어간 적도 여러 번이다. 무엇보다 공원 냥이들에게 잘 낚인다.

간만에 귀요미 자리에 온 덩치 큰 녀석이 밥을 청한다
그릇이 없어 비닐을 깔고 여분 캔을 꺼내 줘도 맛나게 먹는다.

 지난 늦가을이었다. 공원 캣대디 한 분이 냥이 겨울집 세 채를 끈으로 묶어 지고 박물관 주변을 지나가셨다. 그게 뭐냐는 내 물음에 겨울 전에 수리를 위해 집으로 가져가시는 중이라고 하셨다. 그 둥치를 보며 속으로

 '사모님이 기겁하시지 않을까???'

 겉에 씌운 검정 비닐이 벗겨져 뜯긴 스티로폼이 여기저기 드러나 손질을 해도 한참 해야 할 겨울집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한 생각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손으로 만지기도 싫어할 텐데. 저걸 어떻게 손질하시지?? 하긴 먹이값도 장난 아니신 데다 중성화 사업이 끝난 겨울이면 자비로 냥이들 중성화까지 하시고 추가 비용도 부담하시던데... 냥이들에게 낚이셔서 정말 여러 가지 일들을 하시는구나 싶었다.

명절 동안 박물관 직원이 돌보는 삼색이에게 물을 급식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물을 정말 잘 먹는다. 아롱이는 물을 잘 안 먹어 걱정이다.

 설 전날이었다. 명절 연휴 4일간 공원 냥이들 밥을 혼자 먹여야 한다. 차례 준비를 하다 냄새를 못 맡는 남편에게 갈비찜을 불에 올려놓고 갈 테니 좀 봐달라며 공원으로 갔다. 두 번 오가기 힘들 것 같아 밥을 여기저기 더 놓고 먹는 걸 살피다 보니 두 시간 정도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탄내가 진동을 했다. 그 사이 갈비찜을 태운 모양이었다. 냄새를 못맡는 사람에게 맡기고 간 내 잘못이었다. 갈비찜은 탄내가 심해 건질 게 없었다. 결국 인근 대형 마트를 다시 다녀와야 했다. 특별한 명절 먹거리라고는 그것밖에 없어 어쩔 수 없었다.


 차례 준비까지 다 마치고 남편에게 ‘설 전에 힘든 일 두 가지를 겪었으니 새해에는 좋은 일만 생기겠지.’라며 덕담을 던졌다. 섣달 그믐까지 액땜을 마쳤다고 말이다.

 이런 일을 겪다보니 남편이나 나나 부부가 쌍으로 낚이는 타입인 걸 다시 알게 된 것 같다. 원망할 일이 생겨도 이제는 화도 내지 않고 그러려니 넘겨버리게 되는 걸 보면 말이다.


 저어기 어디쯤 고양이들이 배고파 보이면 각종 이유를 들어 나도 모르게 가진 먹이를 털어주니 아마 나는 낚이는 타입에서 나아가 낚이길 원하는 타입이 아닐까? 그게 맞는 말인 것 같은 명절이다.

 이번 명절 올겨울 최강 한파 예보나 좀 빗나가면 좋겠다. 어디서 자는지 알 수 없는 아롱이와 귀요미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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