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갑자기 혼자 나가서 컵라면 사 먹고 들어온 아이
우리 애 대단하지 하는 친구
사랑하는 내 동네 친구는 나와 코드가 잘 맞긴 하지만 육아에 있어서는 천지차이다. 내 기준엔 친구의 아들은 막무가내 자기 마음대로이고 친구는 그것을 지나치게 허용하는 것 같다. 1학년 때 하루는 닌텐도 게임을 샀다며 같이 게임하자고 집으로 우리를 불렀다. 친구의 아들은 우리 아들을 불러놓고도 혼자만 게임을 했다. 한 번도 게임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아들이 하려고만 하면 뺏고, '그건 이렇게 하는 거야. 기다려봐. 봐봐.' 해놓고선 절대 주지 않았다. 그때는 지금처럼 그리 친하지도 않았고, 일단 친구가 어떻게 하나 지켜보고 싶었다. 그런 아들을 보고만 있고 한번 혼을 내지도 않을뿐더러 '엄마랑 이야기 좀 하자.' 하면서 차분히 타이르는 친구. 엄마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으며 게임에 빠져있는 친구의 아들과 하고 싶어 애가 타지만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아들을 보며 속이 터져 혼났다. 지금은 덜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목소리가 크고 성미 급한 누군가가 그런 식으로 자신을 밀쳐도 치이기만 하던 아들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하고 싶다고 조용히 말만 할 뿐 게임 주인이 자꾸 뺏어가니 도로 뺏어오지도 못하고 큰소리도 못 쳤다. 그 모습을 보니 더 화가 나서 다음에 할 기회가 되면 또 하자 하고 그 집을 나섰다. 지금 그런 일이 있다면 아이들이 사이좋게 하도록 타이르고 방법도 알려주고 했을 텐데 그 당시에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런 종류의 일은 몇 번이 더 있어서 나는 웬만하면 아이들하고는 안 엮이고 싶었다. 엄마들만 만나고 아이들은 각자 친구들과 어울리게 했다. 남편이 육아에 등한시하고 아이가 외동이라 늘 아이들과 함께 뭔가를 하기를 원하는 친구를 외면하는 것도 미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치이는 아들도 그렇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마음이 아픈 나도 그런 식으로 만나고 나면 마음이 너덜너덜해지고 감당이 잘 안돼 서다.
어느 날 저녁 6시가 넘어 그 친구가 전화가 와서 ㅇㅇ이 거기에 혹시 왔느냐고 했다. 아니라고 하니 집을 나서면서 우리 집에 갈 거라고 했단다. 알겠다고 끊고서 한 시간 반쯤 뒤에 애 찾았냐고 물었더니 옆 동에 사는 할머니 집에 갔다가 용돈을 받아 아파트 옆 편의점에 가서 컵라면을 혼자 사 먹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친구의 반응이 더 흥미로웠다. “대단하지?” 이 일에 대해서 난 정말 할 말이 많았지만 “그러게, 대단하다.”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자기는 우리 아들이 저녁 6시에 갑자기 사라져서는 혼자 편의점에 가서 컵라면 사 먹고 들어오면 어떨 것 같아? 그게 ‘ 와 혼자서 컵라면을 사 먹고 오다니 대단한걸? ’ 하고 놀라워할 일이야? 엄마한테 어디 간다고 알리지도 않고 온 식구가 다 같이 저녁 먹어야 할 시간에 혼자 나가서 컵라면을 사 먹고 온다는 게 말이 돼? 나 같았으면 혼을 냈을 일인데, 어찌 이렇게 태평한 데다 애를 칭찬할 수가 있지?” 남편은 그쪽 엄마 입장도 이해되고, 내입장도 이해된다고 했다. 분명 행선지 알리지 않고 저녁 먹을 시간에 혼자 나가 컵라면을 사 먹은 건 혼나야 할 일이긴 한데, 배고프면 혼자 돈을 구해서 편의점에서 컵라면 사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애가 스스로를 감당할 만큼 컸다고도 볼 수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며 자기가 보기엔 나하고 그 집 엄마하고 반반 섞으면 참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친구와 평소 대화가 잘 통하는 편이라 얘기를 자주 하다 보니 그 집 사정, 우리 집 사정 서로서로 훤히 잘 알고 있다. 친구는 아이에게 관대한 편이라 아이가 무슨 말이든 편하게 한다고 했다. 반면 자주 화를 내는 아빠는 무서워하며 어떤 말이든 편히 하지 않는다고 했다. 엄마한테 하는 말도 아빠한테는 하지 말라고 당부할 때도 있다고 했다. 반면 우리 집에서는 아이는 아빠에게는 속마음을 모두 얘기하지만 나에게는 가려 말한다. 아빠한테 말하면서 이건 엄마한테 얘기하지 말아 달라는 얘길 한다. 내가 걱정이 많고 화도 많으니 아이가 내 눈치를 보는 것 같다. 사랑스러운 거야 내 눈에만 그렇지 밖에 나가면 아이는 사랑받을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아닌 건 아니라고 아이한테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걸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 감정적이 되기가 쉬워져서 늘 말하고 나서는 반성하는 편이었다. 더군다나 우리 아이는 심리적으로 예민한 편이라 내가 좀 더 그걸 전달할 때 있어서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깨달았기 때문에 아이가 나를 이렇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정말 후회스럽고 마음이 아프다.
<나는 상처를 가진채 어른이 되었다>를 보면 부모 자식 간의 애착이 한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하고도 무서운지 알 수가 있다. 저자는 애착을 제2의 dna라 부르며 그것이 한 인간의 성격, 발달과업, 성취, 사회적 지위, 대인관계 등 모든 방면에서 영향을 준다고 한다. 저자는 한마디로 부모는 아이에게 있어서 안전 기지가 되어 무슨 말이든 편하게 할 수 있는 상대가 되어주어 아이가 그 기지를 발판으로 세상을 마음껏 탐구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했다. 그러다가 상처를 받아 다시 돌아와도 다시 그 안전 기지에서 회복하고 다시 밖으로 나가기를 반복하다 결국에는 그 안전 기지를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안심되어 부모가 곁에 없어도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부모의 이 애착과 양육방식이 이렇게 한 인간의 일생을 이렇게 심하게 좌지우지할 정도로 중요하다는 것을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된다면 무서워서 누구나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만큼 부모의 양육태도는 중요하다.
친구의 아들은 아빠가 자주 화를 내더라도 편안한 엄마가 옆에 있어서 컵라면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스스럼없이 밖에 나가서 사 먹고 들어올 수 있었나 보다. 또 웃으며 “라면이 그렇게 먹고 싶었어? 그래, 잘했어.”라고 할 엄마를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을지도 모른다. 반면 우리 아이는 엄마가 걱정하고 통제할 걸 알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도 편히 할 줄 모르고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지레 엄마의 반응을 알고 스스로를 자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눈엔 우리 아이는 차분한 거고 그 집 아이는 막무가내처럼 보이는지도 모른다. 나도 아이를 사랑하는 만큼 아이가 나라는 존재를 안전 기지로 삼고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안심하며 탐색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좋겠다. 나도 아이에게 안전하고 편한 엄마이고 싶다. 아이가 나를 잘 알아 그럴 일이 없겠지만, 만약 다 같이 저녁 먹을 시간에 혼자 나가 컵라면을 사 먹고 들어온다면 “그렇게 라면이 먹고 싶었어? 얘길 하지. 우리 다 같이 라면 끓여서 저녁으로 먹었을 텐데. 저녁시간은 우리 가족 모두의 시간이니까 혼자 나가서 컵라면을 사 먹는 건 다음부턴 자제하자. 갑자기 사라지면 엄마 아빠가 걱정하잖아. 알았지? ”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저녁에 어딜 10살짜리가 혼자 나가서 싸돌아다니면서 컵라면을 먹어! 거기다가 컵라면은 또 얼마나 몸에 안 좋은데! 너 멋대로 자꾸 그렇게 할 거야!” 하지나 않으면 양반이겠지.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가장 아끼며 소중하게 대해야 할 아이에게 폭언, 부정적인 말, 잔소리를 해대며 상처를 주지 말아야지. 그럴 때마다 오은영 박사가 한 말을 잊지 말자. 아이에게 감정적이 될 때마다 숨 한 번 참고. 경계 또 경계. 이러고 있는 나를 일깨우자. 알아차리자. 알아차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