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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K Nov 21. 2023

닿지만 닿을 수 없는 거리-2-

-희극이 지나면 비극이 온다.-


나와 그녀의 또 평화로운

주말들을 보내던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점점 익숙함에 속고 있었다.


나는 학창 시절과 함께 병행하는 운동선수의 생활에 치여

힘들어하고 있었다.

너는 나에게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그거 너라서 할 수 있는 거야! 좀만 힘내보자!’


‘많이 힘들지? 너 지금도 충분히 잘 해내고 있어!‘


등등... 언제나 힘이 되어주는 응원과 새벽에서 여명의 아침으로 넘어올 때 작렬하는 태양보다도 밝은 미소로 날 바라봐주고 날 믿어주었다.

나는 언젠가서부터 떠올렸다.

동성 친구와 이성 친구가 똑같이 응원을 해주는 느낌은

확연히 결이 다른 것이라고.


동성 친구가 응원과 힘을 보태주면

‘뭐야? 생각보다 별 거 아니잖아! 다시 힘차게!‘

이렇듯이 육체적으로 힘내어 할 수 있는 ‘용기’라면


이성 친구가 응원과 힘을 보태주면

‘나의 지친 마음을 이렇게 헤아려주고 이해해 주네...’

와 같이 심리적으로 포근해지며 편안해진다.


나는 늘 그녀에게 그런 값진 선물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의 백색의 순수함만을 동경할 뿐.

그 어떤 호감도 생기지 않았다.


매미와 귀뚜라미가 장황하게 연주회를 열던 한 여름날이다.

무더운 여름인데도 이 여름 시즌의 가수들은 지치지도 않나 보다. 각설하고,


우리의 만남은 더욱더 많아졌다.

어떤 날은 서로 하교 후 교복을 입고 만나서 편의점에서

캔음료수를 사서 하루의 일과를 서로 물어보던 날이었다.

난 그녀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던 바여서

체육관 관장님에게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연습을 빠졌다.

아마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윽... 관장님... 속이 너무 매스껍고 무릎도 너무 아파요...’

라고 말하며 어제의 멀쩡한 나의 모습을 망각한 채 말이다.


그녀가 다니는 학교의 교복은 백색의 폴리에스테르 재질에 허리 라인이 들어가고 넥타이 대신 슬링 타이를 착용하는 하계 반팔 셔츠였다. 치마는 남색으로 단정히 일자로 뚝 떨어지는 h핏 치마였다. 내가 다니는 학교의 교복은 단순하지만 심플하였다. 흰색 셔츠에 벨뱃 재질의 검은색 넥타이, 검은색 테이퍼드핏 바지였다.


우리는 (아주) 가끔 하교를 하는 버스에서 마주쳤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와 나는 집이

10분 채 걸리지 않는 옆동네였다.

그럴 때면 넌 내 옆에 앉아 조용히 눈인사를 하며


‘뭐처럼 만났는데 이번 정류장에서 내려서 수다나 떨래?’

라고 말하면 나는 좋은 생각이라고 하며 같이 내린다.


그렇게 우리는 짧지만 늘 1~2시간씩은 만났다.

전에 했던 얘기로 돌아와서 편의점에서 만나고

너는 나를 기다리며 양쪽 다리와 양손을 경건히 모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늘 내가 편의점으로 오는 방향이 불특정 해서

내가 언제 오나 기다리며 나를 찾았던 것 같았다.

그렇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서로 음료수를 사서

편의점 안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나는 탄산음료를 좋아했고 너는 녹차 혹은 복숭아차 같은

나랑 반대인 자극적이지 않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렇게 서로의 학교에서의 일과를 털어냈다.


내가 먼저 물꼬를 틀었다.

‘오늘 학교에서 점심 먹고 친구들이랑 운동장에서 산책하는데 나무 위에서 나를 보고 있는 새~까만 작은 청설모를 봤어! 엄청 귀엽더라.’

 

그녀가 답변한다.

‘하하하~ 청설모보다 네가 더 귀여운 것 같은데?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라고 말하며 횡설수설하며

당황한 나를 보는 것을 즐기는 듯이

그녀는 ’큭큭‘거렸다. 그렇게 시답잖은 얘기들을 하면서

언제 쌓였는지 몰랐던 스트레스들을 풀어나갔다.


그녀와 조금 더 친해졌을 때는 아침에 만나서 해가 져서 깜깜한 늦은 저녁에 집에 돌아가 부모님에게 혼나기 일쑤였다.

그렇게 점점 평범한 일상들이 언젠가서부터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늘 새로운 이야기를 가져와 질리지 않는 대화를 하였다. 가끔 그녀의 광기 어린 애꿎은 질문을 답해야 할 때는

되도록이면 침묵을 지켰다. 그 질문이란 것을 살짝 들려주자면 ‘너 왜 이렇게 귀여워?’ , ‘너 진짜 잘생겼어! 너 모르지?‘ 와 같은 말들은 나에게는 낯간지러운 말들이었다. 그러나

썩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당연히도 내 칭찬이니까)


만나지 못하는 날에는 밤늦게 메세지하며 통화는 가능할 때마다 해가 뜨는지 모르고 전화하였다. 그러다가 학교에 가면 늘 수업은커녕 점심조차 건너뛰고 숙면을 하기 바빴다.

학교 과목 선생님들께서는 내가 시합 시즌인 줄 알고 전 날에 운동을 열심히 해서 피곤한가 보다고 생각해 주시며 깨우지는 않으셨다. (죄송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학교에서 모범적이며 늘 학우들의 사기를 돋아주는 학생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선생님의 추천으로 1학년 때에는 지원자가 많은 학생 자치회에 들어가며 3학년이 되어서는 학생 자치회의 체육 부장을 맡았고, 선생님들에게 전교회장을 추천받았지만 난 옆반 친구가 정말 하고 싶어 하길래 정중히 거절하였다. 또한 농구를 좋아해서 열심히 했을 뿐인데 조장까지 맡았으며, 전공과 학급에서는 반장을 하였다. TMI지만 나는 동물을 좋아해서 동물전공과에 입학하였다. 나의 학창 시절 커리어(?)는 여기까지 이야기하기로 하고 원론으로 돌아와서 그렇게 학생으로서 본분을 맡은 바 많은 책임을 져야 하는 학생이 마음이 잘 맞고 얘기가 잘 통하는 한 여학생에게 개인의 시간을 할애하여서 나의 본분을 서서히 게을리하게 되었다.

그렇다 해도 그녀와 만나는 시간들은 헛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늘 즐거웠다.


이런 학교생활의 본분을 게을리하고 있을 때 이때 점점

나는 너를 ‘이성’으로 보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그렇게

너와 나는 하천이 길게 이어져 있고 꽃들이 반기는

끝없는 산책로를 걸으며,


그렇게

너와 나는 앉을 수 있는 벤치면은 잉꼬부부처럼 붙어 앉아

수다를 한참 동안 떨고 허기지면 밥을 먹고 헤어지며,


그렇게

너와 나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날이면 시끌벅적한

코인노래방에 가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가사와 접점이

맞는 노래들을 불러주며,


그렇게 너와 나는 늘 평화로운 일상 속에

너는 내게 진심과 추억이라는 망치로

철옹성 같던 나의 마음을 허물어 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리는 누구 하나 마음을 밝히지 않고

서로 먼저 고백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흙을 적셔

기분 좋은 향긋한 향이 오감을 자극하면

우산을 쓰고 나가 말없이 너의 집 앞을 갔고,


눈이 펑펑 오는 날 새하얀 커다란 천이

세상을 덮어 오면은 두꺼운 패딩을 입고

모자를 쓰고 설렘과 기대라는 발자국을 남기며

너를 만나러 갔다.


그렇게 너를 알고 지낸 지 1년이 넘는 시간이 되어간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우리는 누구도 먼저 고백하지 않았다.


왜 하지 않았을까?


거절당하는 게 두려워서? 아니다.

이미 고백의 때를 놓쳐버려서? 아니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아니다.


우리는 그저 그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 않은 덕분에

더욱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 거다.


그러나


학생의 생활을 마쳐가는 시점에서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라는 무시무시한 유행병이 발생하였을 때

모든 것이 귀찮아지고 있었다.


나의 이상형은 복싱 밖에 없다고 말하며

그렇게 좋아하던 운동도


평소에 유일하게 감성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두꺼운 책을 타파하는 재미로 읽던 독서도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욱 사랑해 준

그녀 또한 어느새 귀찮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코로나로 인한 운동선수의 인생을 결정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중요한 시합들이

무산되어 몇 년을 노력하여 보낸 세월이

허숭생활이라 느껴지며 꿈과 목표가 사라져서일까?


그 해의 나는 무엇을 해도 우울하였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외톨이를 자처하였다.


만나던 친구들의 연락도 피하고

굉장히 좋아하던 산책도 안 하고

그녀 또한 그 시점으로 인하여

집에서 외출을 통제하여 멀어지고 말았다.

그녀의 집안은 상당히 엄격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허무함과 공허함으로 인하여 연락을 안 봤던 것도 있다.


사랑도 사랑이지만

꿈과 목표 또한

그 이상의 역할을 하니까.


그렇게 모든 것을 밀어내고 부정적으로 변하니까

세상에 대한 원망을 그래도 그나마 만나고 있던

소수의 지인들에게 간접적으로 드러내며

신경질적으로 변해서 난 더 이상

학교에서 동급생들이 날 바라봐주는 동경의 시선과

선생님들이 바라봐주셨던 모범적인 학생이 아니게 되었다.


야망 가득한 꿈을 자신의 의지로 포기하는 것이 아닌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만 하였던 그 상황은

겪어보지 않는다면 그 기분을 모를 것이다.


나는 어떠한 위로도 공감도 받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돈이라도 벌자라는 마음에

전공과의 지식을 살릴 수 있는 타지에 있던

중소기업으로 취업하고

그 회사에 재직 중인 사이 어느덧 졸업식이 찾아와

‘코로나’로 인하여 교내에서 안 하고 화상 프로그램으로

졸업식을 진행하였다.

고등학생의 과정을 끝마치는 동시에

성인이 되어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가득하였던

졸업식조차도

화상 프로그램으로 진행하다니...

나는 더더욱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힘든 시간들 속

오랜만에 친구라도 만나려고 2시간 30분 동안 버스 타고

본가가 있는 지역에 도착하여 게이트를 빠져나와서

목이 말라 편의점에 들어갔는데 카운터 쪽에서

익숙하고 그리운 상냥하고 친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세... 어...? 혹시...?‘



추억과 현실은 늘 내게 커다란 시련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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