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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휘 Apr 01. 2024

50세의 자유

독서에서 자유를 찾다

늦은 나이에 엄마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젊은 날에 엄마가 되어 아이를 다 키운 친구들을 보면 부러웠다.

그들이 자유를 포기하고 엄마가 되어있을 때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았으면서, 이제 그들에게 자유가 왔을 때 나는 처음으로 가져보는 그들의 자유를 탐냈다.

그때, 그러니까 친구들은 엄마가 되었을 때 나는 결혼도 하지 않은 싱글로 누린 자유가 진정한 자유였을까?

나에게 자유란 그때도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방종이라 할지라도 내키는 대로 하는 것.

그렇게 친다면 친구들은 결혼해서 엄마가 되었을 때, 나는 싱글이었던 그때의 나도 결코 자유롭지 않았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엄마가 된 그들보다야 많았겠지만 정작 하고 싶은 것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누구나 그러하듯 돈을 벌어야 했고, 주말에 누리는 자유는 자유라기보단 방종에 가까웠을 뿐이었다.

그래도 지금 내가 그렇듯 아이를 키우지 않거나, 다 키웠거나 그런 상태의 타인이 부러운 마음은 백분 이해된다.

그때 그들이 나를 부러워했듯 지금은 내가 그들을 부러워하는 건 사실이니까.

나도 겪어봤으면서도 마치  그들은 내가 갖지 못하는 자유를 가진 듯보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자.

누구에게나 자유란 각각 다른 의미를 품고 있을 수 있다.

다른 누군가의 자유와 내가 원하는 자유가 충분히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들의 자유가 마냥 부럽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나에게 자유라면 깊게 파고들어 생각할 거리는 하고 싶은 것이란 도대체 무엇이냐가 되겠다.

2,30대의 나에게 자유스러운 그 하고 싶은 것들이란 대개 먹고 마시고 노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하고 싶은 것들 중에 먹고 마시는 것은 없다. 

먹고 마시고 놀고.... 그걸 해본 20대와 해보지 않은 20대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20대에 엄마가 되어 아이를 키운 친구들은 40대에 늦바람이 분다. (누구나 그런 건 아니지만)

왜냐고? 자기는 20대에 못 놀아봤으니까. 보상이라도 받듯 아이를 다 키우고 난 후에 뒤늦게 클럽을 다니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다니고 소위 말하는 노는 것에 심취하게 되는 친구들의 경우를 나는 많이 봤다.

하지만 똑같이 논다고 해도 20대에 하는 것과 40대에 하는 것은 확연히 다르다.

몸도 다르고 마음도 다르며, 흐르는 공기부터 모든 것이 같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그걸 모른다. 그들에겐 처음이니까. 처음이라서 그게 원래 그런 것인 줄로만 안다.

그게 아닌데.... 그런 것들이 파악 가능한 내가 나는 오히려 더 좋다.

비록 지금은 늦은 나이에 육아를 하고 있어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노는 게 어울리는 꽃다운 나이에 나는 엄마가 되지 않고 그냥 놀아봤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안이 되기도 한다.

뭐든 제때에 해야 딱 맞아떨어지는 그런 것들은 분명 존재한다고 믿으니까.


지금의 나도 자유를 외치며 산다. 20대에나 30대에나 마찬가지로.

아~ 자유롭고 싶어, 아~~ 혼자 살고 싶어.. 등등

그렇다면 나는 어떤 자유를 원하는 것일까?

밥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자유, 자고 싶은 만큼 자도 되는  자유, 하기 싫고 귀찮은 일은 눈감아버리는 자유,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되고 나가기 싫으면 안 나가도 되는 자유?

이런 게 자유일까? 이런 자유를 마음껏 누린다면 폐인이 되지 않을까 싶은 갈망들뿐이다.

나는 이런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 축 처지지 않고, 어디 콕 처박혀있지 않는 그야말로 새처럼 날아다니는 자유.

그것이 내가 원하는 자유인데, 지금은 가정에 묶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입버릇처럼 자유롭고 싶어라고 외치며 산다.


방종하지 않고 책임질 수 있는 자유를 나는 책에서 찾는다.

몸은 묶여있고, 이러다 이내 정신도 묶일 것 같아 늘 책을 읽으며 산다.

독서는 습관이라 어릴 적 습관이 이토록 오랜 세월 내 몸에 착 붙어준 것은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을 따라 역경을 이겨내고 작가가 되기도 하고(작은아씨들의 조처럼), 작가가 쓴 에세이를 따라 함께 걷고 달리기도 하고 (하정우-걷는 사람, 김연수- 지지 않는다는 말, 무라가미 하루키 등등), 현실에서 동떨어진 아주 먼 과거로부터 온 수많은 남자와 여자들과 함께 그들의 세상으로 갔다가, 나의 세상으로 왔다가 미래의 세상까지 여행을 하기도 한다.

동경하는 나라에 관련된 여행서적을 보며 더 큰 동경을 갖게 되고, 반드시 갈 거야 하며 다짐과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책 속 여행지에 나도 있는 것 같은 상상을 하면 또 얼마나 행복한가.

나와 같은 처지의 주인공을 만나거나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작가를 만날 때면 위안과 위로를 얻기도 하고 해보지 않은 일, 가보지 않은 길 등에 도전할 용기를 가지게도 된다.


내 몸은 이 집에 갇혀있으나 내 정신과 영혼은 매일 그렇게 온 세계를 둥둥 떠다닌다.

오늘의 나는 18세기의 독일에서 헤세를 만나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자유로움이란, 내가 원하는 자유로움이란 무언가 파이팅이 넘치지 않고, 반항도 뭣도 아닌 잔잔하고 고요한 자유라고나 할까.

그게 20대와 50대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나이라는 것은 시간만 쌓는다고 먹는 것이 아니므로 나는 50년의 세월 동안 내 마음속에서 자유를 외쳤던 젊음의 열기도 모두 지나온 터 이제는 그때보단 덜 액티비티 하지만 골저스 한 자유. 그런 자유를 원한다.

뒹굴대지 않는 자유, 빠르게 섭렵하려 하지 않는 자유,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를 맡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자유.

그 자유는 여행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내가 만약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어쩌면 자유에 대해 지금처럼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책이 주는 자유는 젊은 날의 독서와 비할 수가 없다.

젊은 날엔 탐독하며 하나라도 더 뭔가를 손에 쥐기 위해 책을 읽었던 것 같은데 지금의 독서는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것이 많으며 친구를 만나 대화하는 느낌이 더 많이 든다.

여전히 책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지만  2,30대 때보단 느리게 그리고 천천히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크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오늘 모르면 내일 알게 될 거야 하는 마음으로 아주 조금씩 책과 친해지려 한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책이 말하고 싶은 것을 더 경청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책 속에서 만나는 자유가 나를 점점 더 단단한 고목나무로 만들어준다.

자유의 바다에서 유영을 하며 깊어지는 사고와 단단한 내면으로 비로소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다.


나는 물론 내 아이가 성인이 되면 자유를 찾아 떠날 것이다.

책에서 만난 친구들과 약속했다. 

그곳으로 가서 그들의 세상에서 혹은 그들이 살았던 세상에서 나의 세상과 크로스합체가 되는 어떤 접점을 찾아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점점 더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어갈 것이다.

바다만큼은 아니어도 바다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고 싶다.

그 마음 자체가 자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유에 목마른 사람들에게 진정한 자유란 결국 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는 그런 할머니로 진화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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