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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휘 May 30. 2024

책과의 인연

도서 인플루언서의 일상

나의 오랜 인연: 책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책을 읽어왔다.

하지만 내 기억에는 그저 만화책만 읽은 생각만 난다.

엄마가 그랬다.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였는데 다른 여자아이들은 모두 바비인형을 사달라고 조를 때 나는 명작동화전집을 사달라고 하던 아이였다고. 그래서 엄마는 내가 커서 한 따까리 정도는 하는 인물이 될 줄 알았단다.

아임쏘리다.

물론 나에게도 바비인형은 있었다. 날씬하고 예쁜 몸매에 긴 금발머리를 가진 바비가 나는 부러웠다. 나도 이렇게 금발머리였다면 좋았을 텐데. 뭐가 좋을지는 몰라도 아무튼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은 바비를 볼 때마다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바비인형을 좋아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바비는 내가 동경하던 외국이 집이니까, 질투가 나니까.

바비는 늘 방바닥을 굴러다녔고, 가끔 옷 갈아입히는 정도로 내 할 일은 다했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나는 바비인형보다는 책을 더 좋아했다. 명작동화 속에는 내가 생각하는 수많은 바비가 있었다.

책 속에만 존재할 것 같은 그런 세상이 나는 궁금했고, 늘 호기심을 가지며 여러 나라를 상상했다.

1980년대의 나는 책 속에 있는 다른 나라는 상상외엔 만나볼 길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오래전에 이민이든 유학이든 갔던 사람들이 있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채 말이다.

그래서 아빠가 해외에 파견을 나갈 땐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은 무서움을 느끼곤 했었다.

나도 직접 바비가 되어볼 걸 그랬다. 마음만 먹었으면 가능했을텐데...하는 아쉬움이 있다.


중학생이 되어선 동네 만화방에서 살았다. 지금 기억나는 작가이름은 황미나작가님 뿐이지만 그때의 나는 순정만화부터 슬램덩크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만화책이란 만화책은 모두 읽었다.

순정만화 속 그 멋진 남주들과 멜랑꼴리 한 감정들을 느끼면서 나도 이런 만화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미대입시 때문에 책을 거의 못 보고 지냈다. 이때가 내가 처음으로 책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때였다.

대학에 가서부터는 소설에 빠졌다. 신간은 당연히 다 봐야 직성이 풀렸고, 내가 책을 고르는 기준은 베스트셀러뿐이었다. 성인이 된 후 나의 첫 번째가 된 남자친구는 책을 좋아하는 나에게 책을 사다 바치기 시작했고 덕분에 향후 몇 년간 내 책값은 굳었다.

소설에 빠지면서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하지만 자신은 없었기에 괜스레 나이를 핑계 대며 나중에 아주 나중에 나이가 먹으면 해야지 했다. 한다고하면 된다던가...

당장 소설 쓰기를 시작하는 대신 나는 서재에 대한 로망을 품기 시작했다.

영화에서 자주 보았던 천고가 아주 높아서 정말 정말 긴긴 사다리를 걸쳐놓은 그런 서재 말이다.

사다리는 분명 아주 긴 것이어야 한다. 도서관스러운 서재를 가지 고야말겠다고. 여전히 갖지 못했다.



내 인생 가장 멋진 에피소드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때에도 중2병은 있었다.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며 나쁜 짓들을 하고 다니던 때, 우리 부담임 선생님은 국어선생님이었다. 어느 날 쌤이 나를 교무실로 불렀고 나는 툴툴거리며 밍기적밍기적 교무실로 몸을 구겨 넣었다.

나를 앉혀놓고 조곤조곤 몇 마디를 하시더니 불쑥 내민 책 한 권.

"너라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당장은 아니더라도" 라며 건넨 책. 그것은 <데미안>이었다.

너라면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말도, 데미안의 내용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니 이해하려들 지도 않았다.

참 이상한 것은 사는 내내 나의 중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그때 그 교무실밖에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를 바라보던 선생님의 걱정스럽고도 다정하던 눈빛, 표정,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었던 쌤의 말하던 입술, 동그란 안경, 얇고 하얀 종아리, 검정 슬리퍼, 반팔 블라우스 아래로 곧게 뻗은 쌤의 하얀 팔, 그 팔을 휘감고 있던 연그레이색 잔털들, 선생님은 팔에 털이 많았다. 털이 많은 여자는 미인이라던데 쌤은 미인은 아니었다.

이런 작은 기억들은 종종 나를 덮치곤 했다. 불쑥불쑥 허락도 없이, 맥락도 없이 잊을만하면 툭툭.


데미안을 다시 손에 든 건 30대 초반이었다. 그때 쌤이 준 데미안이 나를 노려보았다.

"너라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라던 쌤의 말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데미안>을 네 번 만났고 이제는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데미안도, 그때 쌤이 왜 나에게 이 책을 줬는지도.

내 인생 가장 멋진 에피소드였다. 선생님과 데미안이라니... 정말 감사할 일이다.

어쩌면 선생님은 예지력이 있었던 게 아닐까? 내가 끝내 책으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느닷없이 하곤 한다. 그렇게 임팩트 있는 사건을 만들어주신 쌤 덕분이라면 덕분이다.

나는 점점 더 책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책이라는 세계 속에서 탐험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즐겁고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니 말이다.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 보니 지난날의 나의 독서는 독서라고는 할 수 없다.

그저 재미있는 책만 골라서 읽는 책편식도 심했고, 차분하게 음미하기보다 바쁘게 빠르게 그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책장을 휙휙 넘기기 일쑤였고, 읽으면서 밑줄 같은 건 그을 생각조차 못했고, 읽고 난 뒤엔 다시 그 책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에게 재미있는 책이란 공감되거나, 흥미롭거나, 슬프거나, 설레거나, 웃기거나 하는 등의 감정 그 자체만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지금 내가 책에서 느끼는 재미와는 매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그때는 책 읽는 여자 축에도 끼면 안 되었고, 애서가라는 말은 건방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읽은 책들 덕분에 나는 책이 더 궁금해졌고, 양서를 구별할 줄 아는 안목이 생겼으며, 독서법에 대해 공부할 마음도 얻은 것이 아닌가 싶다.



내 인생 최고의 책태기

고등학교 다니면서 입시를 준비하느라 책을 못 읽었던 때를 제외하고 독서를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

아이를 낳고 전업주부가 된 나는 육아가 정말로 힘들었다. 시댁 친정 모두 멀리 떨어져 독박육아를 해야 했던 나는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르며 살았다.

나는 늘 밖에 있어야 어울리는 사람인 줄 알고 산 세월이 40년인데 하루아침에 온종일 집안에 갇힌 것이다.

사랑스러운 아이는 그 시절 나의 노고를 날려버려 줄 만큼 나의 전부가 되었지만, 아이가 잠이 들고 나면 나는 멍해지기 시작했다. 몸은 피곤해죽겠는데 억지로 꾸역꾸역 거실로 기어 나와 티브이를 틀고 맥주를 마셨다.

그 시간만큼은 나에게 주는 보상이라며, 그 시간을 놓치기가 싫어서 하루도 안 빠지고 루틴처럼 아이가 잠들면 나는 티브이를 켰다.

책은... 읽고 싶지 않았다. 즉각적인 보상이 필요했다.

그렇게 4년을 보냈다. 4년 동안 나는 나를 위한 책 한 권도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책을 아예 손에서 놓은 건 아니었다. 아이를 위한 육아서, 아이를 위한 독서법, 아이 동화책, 영어그림책. 책은 언제나 차고 넘쳤으며 단 하루도 아이에게 책 읽어주기를 빼먹은 적이 없다.

물론 아이와 함께 아이책을 보면서도 얻고 배우는 건 많다. 모든 책은 그러니까.

하지만 아이책과 나를 위한 책을 분리할 필요는 분명 있다.


아이가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하니 그동안 내게 없었던 낮시간이 주어졌다. 그 시간부터 티브이를 보며 맥주를 마실 순 없고 (그건 재미있지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맙소사. 시간이 이렇게 많은데 내가 할 일이 없다고?

하는 수없이 유튜브를 배회하다가 내 생에 처음 본 단어가 눈에 딱 꽂혔다. 자. 기. 계. 발.

유튜브 알고리즘은 나를 자기 계발 관련 강의 영상으로 이끌었다.

'이게 요즘 유행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수히 많은 자기 계발 영상을 보다 보니 하나로 모여지는 어느 한 지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독서'였다.

자기 계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독서.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습관 독서.

보던 영상을 당장에 중지하고 생각했다. '그래, 나도 원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잖아, 그래! 다시 책을 읽자'

그렇게 4년 만의 공백기를 깨고 나는 다시 책으로 돌아왔다.

매일 티브이를 보며 맥주를 마시며 느끼던 그 공허함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매우 신이 나기 시작했다.

자... 무엇부터 읽어볼까... 아이책으로 책장을 채우느라 모두 박스에 넣어두었던 내 책을 꺼냈다.

그리고 나를 위한 책장을 하나 샀다.

아이 책을 워낙 많이 샀던 터라 내 책을 둘 자리가 없어 박스에 넣어 창고에 두었던 그것들을 다시 들여오면서 어찌나 미안했던지... 하지만 이내 내 안에서 반짝반짝 빛날 그 아이들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렇게 나는 예전과는 다른 진짜 독서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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