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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마가린 맛

아빠의 마가린된장찌개비빔밥

by 그레이스웬디

1980년대 내가 국민학생이었던 시절. 아빠는 된장찌개에 마가린을 비벼먹는 걸 좋아하셨다.

내 기억으로는 동그란 통에 들었던 것 같은데, 초딩었던 나는 아빠가 비벼놓은 된장찌개마가린밥을 한 수저 입에 넣었다가 이게 무슨맛이냐며 뱉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요즘 그 비빔밥이 나도 맛있어진다.



요즘 핫한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를 틈틈이 보고있다.

엄마이야기, 아빠이야기가 소재인 책이나 드라마를 보면 자꾸만 눈물이 나서 안보려고 하는 편인데, 사실 이 드라마는 검색을 전혀 하지않고 보기시작했다. 역시나 부모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드라마 다시보기하는 시간은 늘 혼밥을 해야만하는 점심식사시간인데, 이 시간은 내 하루의 휴식시간이다. 이 시간만큼은 드라마를 허용한다. 집에 티브이는 오래전에 없앴으므로 주로 폰으로 보는데 딱 한 시간만 보자고 나 자신과 약속을 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쩌다보니 7화를 보고 8화까지 보게되었다. 밥을 입에 넣으면서도 줄줄 흐르는 눈물에 콧물에 누가보면 가관도 아닌 모습으로, 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그러쥔 채 그저 펑펑 울다가, 장면이 바뀌면 또 밥을 입에 넣었다가....


내가 눈물 콧물을 뺀 장면은 주인공 애순의 엄마가 죽었을 때도 아니고, 애순의 막내아들이 죽었을 때도 아니었다. 애순의 첫째딸 금명의 학교 기숙사앞에서 금명을 기다리던 애순의 남편과 금명의 모습때문이었다.

서울살이의 매서운 바람을 부모에게 그대로 말할 수 없는 금명과 하필이면 그날 금명을 찾아온 아빠를 보니 더 속상한 금명이다.

나도 저랬는데....나도 기숙사를 나가야했을 때 엄마 몰래 아빠가 와서 방을 구해주었었다.

아빠는 기숙사에서 왜 잘렸느냐고 한 마디 타박도 없이 그저 깨끗하고 좋은 집을 찾아주며 더 넓은 자취방을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했었다. 그때 나는 21살이었으니 어린 나이도 아닌데 왜 그런 아빠에게 미안함이 1도 없었는지. 드라마 속 금명은 등뒤에서 꼬인 아빠의 가방끈을 보는 것도 속상해하던데, 나는 그런 적이 없었다.

드라마 속 금명처럼 살뜰하고 애교많은 딸이 못되는 건 어쩜 나랑 저리도 똑같을까 하는데 그래도 금명은 아빠앞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 투정이라도 부리는 딸이었다.

나는....투정을 부리고 싶을 나이에 아빠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다.


시간이 벌써 24년이나 흘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잊히는 줄 알았는데, 어째서 시간은 나를 자꾸만 그때로 데려가는지 점점 더 선명해지고, 점점 더 어제일만 같다.

차라리 어제일이라면 내가 한 말을 물릴수도 있을텐데. 20년이란 시간동안 잊으려 애쓰며 살았던 날들이 무색할 정도로 잊히기는 커녕 자꾸만 자꾸만 또렷해진다.

왜 그랬냐고. 그때 왜 그렇게 우리를 버렸냐고 묻고 따진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싶어 그냥 없었던 일처럼, 그냥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인것처럼 생각하며 살려고 무던히 노력했는데...

그런데 내가 나이가 들수록 왜 더더더더 아빠 생각이 나는건지, 그런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너무 짜증날 정도로 싫다.

너무 좋았던 추억이 많아서였을거야. 세상에서 우리아빠가 최고라고 자랑하며 살았던 날들이 많아서였을거야. 그것만 아니면 아빠는 우리에게 정말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일거야. 그 좋았던 기억들이 한방에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내동댕이 쳐졌다. 딱 그 하나라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더 생각나는 거라고.

그때 내가 아빠를 잡았더라면 지금 우리 가족은 달라졌을까?

그때 내가 아빠에게 그렇게하라고 허락만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엄마는 더 행복했을까?


내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죄책감이라는 물방울이었다.

나는 30년째 그 죄책감을 안고 산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빠를 잡지 못한 죄책감, 아빠를 놓아버린 죄책감때문에 아빠가 등장하는 이야기에는 등을 돌리곤 했다.


40대가 되고부터, 내가 엄마가 되고난 후부터 아빠는 그렇게 내 기억속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죽으면 연락이 오겠지. 아직 연락없는 걸보면 어디 살아있나보지" 엄마가 이렇게 모진말을 했던 게 이해가 되기 시작한 것도 내가 엄마가 되고난 후였다.

살아보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피부로 느끼게 되면서 더더욱 아빠는 잊히기는 커녕 유령처럼 내 주위를 맴돌았다. 엄마의 인생을 고달프게 한 공범이 나라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며 아닌척하기가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엄마에게 아직도 하지 못한 말. "엄마 사실은 그때 아빠가 나한테 양해아닌 양해를 구했어. 엄마랑 헤어지기로 결심했다는 말을 나한테 먼저 했었어. 그래서 내가 그렇게 하라고 했어....."

그때는 왜그랬을까? 내 나이 28살. 전후상황 생각지도 않고 아빠도 아빠 인생을 살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엄마는?

나에겐 엄마보다 아빠가 더 소중했던것일까? 왜?

차라리 아빠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그때는 조금 나으려나 생각하다가도, 내가 찾아나서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또 두려워지다가도, 그래도 자식의 도리가 이건 아니지 하는 또 다른 죄책감이 내 발목을 잡다가도, 아니야 아직 용서할 수 없어 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아빠를 생각했다가 둥둥 떠다니는 아빠의 환영을 머리를 내저으며 기어이 날려버리곤 한다.



드라마 속 금명 아빠가 말한다.

"아빠는 아직 여기있어. 그러니 네가 하고싶은 거 다 해."

나의 아빠는 여전히 여기 없다. 그래서 내가 하고싶은 걸 다 못했을 수도 있다.

눈물이 자꾸만 흐른다. 닦지 않기로 한다.

그냥 오늘은 좀 펑펑 울어야겠다. 한 십년만에.....

그래도 대충 이렇게 간단히 글로 쓰기만 했는데도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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