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하자 플래닝
어릴 때부터 일기를 써왔다.
어른이 된 후에도 계속 썼는데 어느 순간 일기장을 훑어볼 때면 얼굴이 찌푸려졌다.
뭐가 매일 자질구레한 일들 뿐인지, 근사하지도 않고 맨날 징징거리고, 뭐가 맨날 답답하고.
그 기록들을 보는데 대체 뭘 하고 살았던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를 만나 술을 마셨네, 누구에게 고백을 받았네, 또 누구를 만나 뭘 했네. 거의 모든 나날들이 친구들을 만나 술 마신 얘기, 남자 때문에 골머리 썩던 얘기, 그리고 지루한 일상이라며 툴툴대던 얘기가 전부였다.
그리고부터는 일기를 아주 드문드문 쓰기 시작했다. 뭔가 기록하고 싶은 일들이 생기는 날에만.
가끔이라도 일기 쓰는 건 의식 같은 거였다. 그렇게라도 써두지 않으면 언젠가는 전부 다 날아갈 것 같아서. 그럼 내가 지나온 시간들이 실타래처럼 엉킬 것 같아서.
일기와 다이어리는 별개로 생각했었다. 일기는 그냥 노트에 나의 하루와 나의 생각을 적는 것이고, 다이어리는 뭔가 계획을 세우고 실천을 하는, 일기보다는 전문성을 지녀야 하는 기록의 형태라고 생각했었다.
어학사전을 보면 diary는 앞으로 할 일을 적어 넣은 메모장이고, 일기(journal)는 그날그날 느낀 점을 표현하는 장부라고 나오는데 다이어리의 두 번째 뜻으로 일기도 포함되긴 한다.
그래서 나는 일기장 따로 다이어리를 따로 사용하고 있었다. 다이어리는 진짜 말 그대로 3월부터 텅텅 비어있기 마련이다.
그러다가 기록에 대한 책과 영상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불렛저널은 나에게 기록에 대한 생각의 틀을 확실하게 바꾸어놓았다. 불렛저널을 알고 보니 나는 불렛저널을 쓰고 있진 않았지만 이미 그런 방법으로 독서노트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독서노트를 쓰면서 느꼈었는데 왜 일기나 다이어리에는 적용할 생각을 못했는지, 참 내 머리의 한계란 주입식 교육의 산실이다.
아무튼 불렛저널에서 제시하는 기호는 귀찮아서 쓰지 않고, 나만의 스타일로 컬렉션을 셋업 하며 저널링을 하기 시작하다가 또 다른 기록법을 알게 되었다. 바로 <거인의 노트>의 저자 김익한 교수님의 강의에서 들은 내용인데 일기를 자기반성으로 가득 채우지 말라는 거였다. 그렇게 쓰는 게 일기가 아니라고. 띠용~~ 그럼 뭐가 일기인가요~~ 교수님은 그 기록을 플래너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곳엔 나의 하루 계획과 시시각각 내가 한 일과 그 일을 하면서 느꼈던 감정, 상황, 장소들과 하루를 돌아보며 잘한 일과 반성할 일과 앞으로 계속할 일과 오늘 배운일 등등을 다 적는 것이 일기이며 그게 플래닝을 하는 거라고 하셨다.
와 바로 이거다 싶었다. 한 페이지에 나의 하루를 다 집어넣는 것. 그걸 기록할 생각을 하니 너무너무 신났다.
그래서 정착한 나의 플래너+불렛저널을 나는 풀렛이라고 부른다. 한 달 셋업은 이미 하던 것들이 있어 그대로 진행하는데 데일리 셋업이 김교수님 덕분에 바뀌게 되었다.
그렇게 거의 1년을 매일 썼는데 요즘 내가 시들해진 것이다.
데일리를 쓰다 보니 나의 하루가 매일 비슷하고, 매일 같은 일을 매일 기록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은 것이다. 습관형성을 위해서였다면 이미 습관으로 자리 잡았으니 더는 필요 없어 보이고, 나의 성장 도구로 사용하려는 거였다면 매일 같은 말을 적는 게 점점 성장보다는 습관 같아질 뿐이었다.
기록의 매너리즘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한 달 동안 몇 번을 제외하고 거의 쓰지 않았다. 진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풀렛시간이 꽤 걸린다는 걸 매번 느꼈다. 오전에 책상에 앉아 제일 먼저, 하루가 다 끝나고 잠자리 들기 전 책상에 앉아 젤 마지막으로 하는 게 풀렛인데, 이 시간이 한 시간씩 걸린다. 오전엔 하루를 그려보고 계획을 짜고 저녁엔 하루를 돌아보며 많은 것을 기록한다. 그러다 보면 한 시간씩 걸리는 것이다. 풀렛을 안 하기 시작했더니 나에게 시간적 여유가 생기는 것이 좋더라. 그래서 매일은 안 해도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고, 매일 기록하지 않은 것이 그렇게 후회스럽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나는 뭔가 구멍을 발견했다.
1년이 넘도록 매일 한 시간 이상 투자를 하며 플래닝을 했고, 책상에 앉을 때마다 풀렛노트를 꺼내 방금 전까지 무얼 했는지 수시로 기록했다. 그리고 그 모든 기록을 안 하기 시작했고, 안 하는 편함이 생기는가 싶더니 내가 안 함으로써 해야 할 일도 안 하고 있다는 것을, 엄밀히 말하면 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게 억지라면 억지고, 내 느낌이라면 느낌일 뿐이겠지만, 소름이 돋았던 건 내 인플루언서 순위가 떨어지기 시작한 것도 플래닝을 안 쓰던 날부터였고, 어제처럼 브런치에 연재하는 날조차도 글을 미루고 미루다 늦은 밤에야 겨우 쓰는 일이 발생했다. 계획하던 것들은 그 계획대로 실행을 잘하니까 매일 하는 일이 같은 일로 느껴졌는데, 계획하지 않았더니 시간을 쓰는 법이 달라졌고 하던 일을 제때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나는 놀랐다. 특별할 것이 없어서 안 썼는데, 안 썼더니 일상적인 것들조차 간과하게 되면서 쓰는 하루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특별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는 그런다. 하루를 그렇게 빡시게 살아야 하나? 그러다가 번아웃 온다며. 플래닝을 하는 건 기계처럼 하루를 빡시게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할 일을 미루지 않고 바로 해내게 만들고, 다음 할 일을 자연스럽게 끌어온다. 자기 성장은 별게 아니다. 그저 묵묵히 오늘 할 일을 다 해내는 것. 그 하루가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성장해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목표는 따로 있겠지만 그 목표에 도달했을 때야 비로소 '나 성장했어' 가 아니라 그저 그런 하루 같아 보였던 이 하루를 온전히 정성스럽게 쓰는 날이 반복되는 그 과정 자체가 성장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플래닝을 하지 않던 몇 날 며칠 동안 나는 나아가긴커녕 하던 일도 못 했으니 오히려 퇴보한 게 아닌가.
그래서 다시 각 잡고 매일 아침 풀렛하기로 한다.
시간이 지나 들춰보았을 때 예전처럼 '뭐가 맨날 이렇게 지루해'가 아니라 '와, 나는 이렇게 끈기 있게 같은 일을 해내며 살았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플래너에 적는 나의 반복되는 일은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이다. 목표달성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들. 어떤 목표에 다가가는데 필요한 일은 매일 반복되는 것이다. 그걸 그저 그날이 그날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어제도 했고 오늘도 했지만 그렇기에 어제와 오늘은 분명히 다른 하루니까.
다시 또 나아가자. 5월 한 달 충분히 빈둥대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