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에 핀 수수꽃

자연의 순환

by 진주


오늘, 병원 옥상 한 켠 척박한 스티로폼 화분에서 키 작은 수숫대 끝에 붉은빛을 머금은 수수가 고개를 숙여가고 있다. 흙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땅이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라나는 생명력은 보는 이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수수의 오랜 역사와 나의 기억

수수는 인류와 가장 오래 함께해 온 곡식 가운데 하나다. 열대 아프리카가 원산지이며, 기원전 6천 년 전부터 재배되었다. 실크로드를 따라 아시아로 전해져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까지 들어왔고, 함경북도 회령의 청동기 유적에서도 수수 흔적이 발견될 만큼 우리 민족과 긴 시간을 함께해 왔다.

나의 기억 속에도 수수는 여러 모습으로 자리한다.
어린 시절, 속이 빈 수수 줄기를 잘라 만든 수수깡은 상상력의 놀잇감이었다. 가볍고 변형이 쉬워 만들기 과제와 놀이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결혼 후에는 수수팥단지로 이어졌다. 갓난 아들의 건강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어머니와 함께 정성껏 빚어 팥고물에 굴려냈다. 붉은팥은 잡귀를 쫓고, ‘수수(壽壽)’라는 이름은 오래 살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 이웃과 나누던 따뜻한 기억은 지금도 마음을 덥힌다.
그리고 오늘, 우리 집 잡곡통에도 여전히 수수가 늘 들어 있다. 어린 날의 장난감에서, 젊은 부모의 기원으로, 이제는 건강한 밥상의 한 자리에까지—수수는 나의 삶과 늘 함께였다.

어머니와 손자를 향한 약속

병원 옥상에서 붉게 익어가는 작은 이삭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내년에는 어머니께 수수밭을 드려야겠다.”

평생 농사일이 제일 즐겁다고 하시던 어머니께, 작은 밭을 마련해 드려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동시에 곧 태어날 손자를 위해, 다시 한번 수수팥단지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수확의 기쁨을 어머니가 느끼시고, 그 결실이 다시 아이에게 이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연이 물려주는 선물이 아닐까.

수수 키우기, 그리고 삶의 반복

수수는 까다롭지 않은 곡식이다. 5월의 땅에 씨앗을 뿌리고, 9~10월 붉게 익은 이삭을 거두면 된다. 싹이 오르면 튼튼한 몇 줄기만 남기고 솎아주면 되고, 특별한 비료나 손길이 없어도 굳세게 자란다. 척박한 옥상 화분에서도 자라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수수는 본래 강한 생명력을 지닌 곡식이다.

작은 씨앗이 싹을 틔우고, 줄기가 자라 이삭을 맺고, 다시 씨앗으로 돌아오는 순환. 그 과정은 단순한 농사일지가 아니라, 삶의 리듬과 닮아 있다. 어머니가 나를 위해, 내가 아들을 위해, 이제는 손자를 위해 씨앗을 뿌리듯, 생명은 이어지고 관계는 확장된다.

사랑이 이어지는 순환

올가을에는 다시 수수팥단지를 빚을 것이다.
재료는 단순하다. 수수가루와 소금, 뜨거운 물, 그리고 곱게 삶아 으깬 팥고물. 반죽을 빚어 삶아내고, 팥고물을 골고루 입히면 작은 경단 하나가 완성된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 아이의 건강을 기원하는 사랑과 정성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늘 샘물처럼 풍요를 건넨다. 나는 씨앗을 나누고, 어머니는 그것을 키워내며, 다시 나는 수확한 열매를 손자에게 전한다. 자연이 순환하듯, 사랑도 세대를 거슬러 흐른다.

옥상 한 켠의 작은 수수대는 그래서 단순한 식물이 아니다.
그것은 곧 삶의 연속성과 사랑의 순환을 증언하는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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