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 체조와의 만남

우연이 열어준 가능성, 그리고 내가 선택한 길 위에서

by 진주

나는 격렬한 신체 활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운동이라 해봤자 스트레칭이나 산책 정도가 전부였다. 학창 시절엔 볼링과 탁구를 즐긴 시절도 있었지만, 스스로를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여겼다. 신체검사 결과표에는 언제나 빠지지 않고 ‘운동 부족’이라는 지적이 따라붙곤 했다.

코마네치가 세계를 뒤흔들던 시대,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부모와 선생님 모두 학업 위주의 교육을 강조했고, 예체능은 보조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나는 작은 성취에도 마음이 설레곤 했다. 키가 작고 통통 튀는 체조 출신 체육 선생님 수업 시간, 뜀뛰기 활동에서 나는 3단부터 9단까지 가볍고 날렵하게 뛰어올랐다. 선생님은 내 몸놀림을 눈여겨보시고 기계체조를 권유하셨다. 그렇게 6개월 동안 훈련을 받으며 새로운 가능성에 설레었다. 발이 땅을 떠나는 순간, 모든 긴장과 걱정이 사라지는 자유로움 속에서 나는 내 몸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믿음을 키워갔다.

하지만 어느 날 아침, 엄마는 훈련에 가지 말라는 뜻으로 체육복을 물에 담가 놓으셨다. 예체능을 천시하는 사회적 풍토 속에서 나는 결국 체조를 이어가지 못했다. 그것은 내가 선택한 길이 아니라, 누군가 내 재능을 보고 권유해 준 길이었다. 때때로 생각한다. 만약 그 길을 계속 걸어갔다면 어땠을까. 혹시 또 다른 무대 위에서 환호를 받는 내가 있었을까 하는 아쉬움과 기대가 교차한다.

나의 이러한 신체 활동에 대한 거부감은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라, '통제할 수 없는 격렬함'과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무의식적인 방어였을지 모른다. 나는 몸 전체를 사용하는 격렬한 활동보다 손가락처럼 움직임의 폭이 좁고 예측 가능한 활동에서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볼링과 탁구를 즐겼던 과거는 물론, 앉아서 하는 섬세한 작업들에 몰두할 때면 편안함을 느꼈다. 이러한 심리는 수업이나 강좌에서도 이어져, 나는 늘 맨 앞자리 대신 맨 뒷자리를 선택한다. 가장 불편한 상황은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나를 관찰하는 시선이다. 어쩌면 나는 체조 경험의 좌절 이전부터 늘 심리적 안전거리를 확보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타인의 주목을 받았던 체조 경험의 좌절은, 나를 평가하고 개입할 수 있는 모든 시선으로부터 더욱 강력하게 자신을 격리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과거의 큰 사건 대신, 내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손끝이나 관찰당하지 않는 뒷자리에서 온전한 통제감을 갈망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문득 묻게 된다. 재능이 이끄는 길과 내가 선택한 길, 어느 쪽이 진정한 나의 길일까. 이 순간 내가 걷는 길, 그 흔적 하나하나가 바로 나의 길임을. 삶은 이렇게 우연과 선택이 뒤엉킨 길 위에서, 나를 조금씩 만들어 간다. 만약 그 체조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러한 경험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만남 하나가 내 삶에 작은 균열을 만들었고, 그 균열 속에서 나는 내 선택의 의미를 조금씩 깨닫는다.

최근 나는 강도 있는 스트레칭과 운동 기구를 방 안에 재배치하며 근력 운동을 시작했다. 과거 운동 부족으로 늘 지적받고, 타인의 시선과 통제에서 도망치려 했던 나에게, 이 작은 변화는 단순한 운동을 넘어 나의 통제권을 되찾는 행위이다. 머리로는 이 도전을 계속해야 함을 알지만, 오랫동안 움츠려 있었던 몸과 마음 때문인지 여전히 운동에는 자신이 없다. 누군가의 권유나 강요가 아닌, 오직 스스로의 선택으로 땀을 흘리고 내 몸을 깨운다. 그렇게 나는 심리적 안전거리 너머로 한 걸음 나아간다. 늦었지만 나만의 속도로 내가 선택한 길 위에서 나만의 발자취를 새겨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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