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권유한 길, 내가 선택한 길
나의 일과는 세상의 거대한 소란과 분리된, 고요한 사색과 생각으로 채색된다. 세상이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가득할 때, 나는 오히려 나의 작은 왕국, 나의 책상 앞에서 가장 깊은 평온을 찾는다. 종이를 자르고, 공예품을 만들고, 생각을 글로 정제하는 시간은 나에게 몰입의 황금기이며 늘 빠르게 흐른다. 이는 타인과의 관계나 예측 불가능한 외부 활동보다, 한 획 한 획 오차 없이 통제할 수 있는 손끝의 정밀함에서 만족을 얻는 나의 우연한 기질이자 타고난 재능이 권유한 길이었다.
외부 활동은 나에게 '수행해야 할 의무', '진정한 열정'은 아니다. 반면, 책상에 앉아 나와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작은 창작의 시간은 외부와의 통로로 가는 시간이다. 나의 통제 아래 놓인 이 작은 세계 안에서 나는 자유롭고 자유롭다.
이런 기질은 육체적 쾌락보다 지적 성찰에서 기쁨을 구하는 '배고픈 철학자'의 성향을 낳았다. 이 자연스러운 길은 고독의 짐을 함께 지게 했다. 공유되지 못한 사색의 깊이는 인간관계의 폭을 서서히 좁히며 내적 고립을 심화시켰다.
필연적 선택의 순간
이따금 나는 솔직하게 '배부른 돼지'의 안락함을 탐한다. 지식의 무게와 존재의 질문에서 벗어나 감각적 만족 속에서 번뇌를 잊고 싶은 인간적인 피로의 고백이다. 이것은 우연히 권유된 고독이 자연과 사람들과의 소통보다 더 무겁다는 신호이다.
삶은 늘 구름과 강물처럼 흘려보낼 것인지, 머묾과 돌아봄으로 성찰하며 나아갈 것인지의 선택을 강요한다. 존 스튜어트 밀의 말처럼, "만족한 돼지보다 불만족한 인간이 낫고, 만족한 바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낫다." 나는 순간의 안락함을 탐했으나, 결국 안주를 허락하지 않는 내 안의 철학자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이 선택은 나에게 삶을 향유하기보다 성찰의 시간을 통한 고통스러운 깨달음 택하라는 내면의 명령이었다.
나이가 들며 얻은 작은 깨달음이 있다면, 고독한 사색은 혼자만의 세계에 가두지 말라. 작은 사유의 결과물일지라도 말이다. 세상 속 실천으로 옮겨 고독과 연결의 균형을 찾아라. 이 깨달음이 바로, 재능이 권유한 길에서 한 발짝 나아가 내가 주체적으로 길을 선택하는 순간이다.
내가 선택한 새로운 길
나의 영원한 딜레마는 이것이었다. 외부 노출을 피하고 통제 가능한 세계를 선호하는 나의 기질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세상과 효과적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해답은 나의 '작은 왕국'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세상과 만나는 나만의 통로로 활용하는 데 있었다.
내가 선택한 길은 고독이라는 고통 속에서 만들어 낸 진주층의 결정체, 즉 정제된 글과 세상을 살면서 얻은 경험과 통찰을 나누는 것이다. 이는 나의 기질에 완벽히 부합하는 '글쓰기 워크숍'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나는 '앉아서 하는 활동'을 통해 얻은 섬세한 관찰력과 몰입의 가치를 소규모의 통제된 환경(워크숍)을 통해 세상과 공유한다. 이것이 나를 가장 적게 소모하며 세상에 기여하는 실천 방식이자, 나의 기질과 연결을 조화시키는 최적의 해법이다.
실천은 반드시 몸을 던지는 외부적 행위만을 뜻하지 않는다. 흔들림 없이 사유를 이어가고, 그 빛을 글이라는 매개를 통해 조용히 나누는 것 또한 가장 용기 있는 실천이다. 앉아서 이루어지는 고독한 성취는 여전히 나의 뿌리이지만, 이제 그 성취를 내가 선택한 연결의 통로를 통해 세상과 나눌 때 비로소 배고픈 철학자로서의 나의 역할이 완성된다.
우연과 재능이 빚어낸 '나'를 사랑하고 수용하며, 그 기질을 바탕으로 세상과 조화롭게 연결될 수 있는 길을 선택했다. 고독을 넘어 나눔으로 나아가는 길, 그것이 바로 내가 택한 '배고픈 철학자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