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비 오는 날이 좋을까?

세상을 깨우는 비

by 진주

초가을의 선선함이 스며드는 흐린 날, 연일 비가 내린다. 빗방울이 창문을 타고 흐르다 흩어지고, 9층 창문을 스치는 그 소리는 마치 은은한 피아노 선율 같다. 금요일 저녁, 차바퀴가 빗길을 달리는 소리와 도시의 빗방울, 엔진 소리가 뒤섞여 은은하게 실내를 조용히 채운다.

나는 비가 오면 좋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보다 좋고, 눈이 내리는 날보다도 좋다. 흐린 날도, 보슬비도 좋다. 태풍이 몰아치는 것도 싫지 않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아름다운 선율과도 같다. 다만, 빗줄기를 직접 온몸으로 맞아야 하는 상황은 사양이다.

비가 오면 세상이 정리된다. 바깥의 소란스러운 자극이 사라지고, 마치 세상이 잠시 멈춘 것처럼 느껴진다. 그 정적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나에게 집중할 수 있다. 어수선하던 것들이 씻겨 내려가고, 흐릿하던 마음도 제 얼굴을 드러낸다. 내 마음이 어디쯤 서 있는지 잘 보인다.

나는 나에 대해 관심과 탐구욕이 높다. 왜 내가 흐린 날, 비를 좋아하는지 늘 궁금했다. 나는 시끄럽고 사람 많은 공간, 강한 빛과 소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복잡한 환경에서 쉽게 피로하고 산만해진다. 작은 자극조차 크게 느껴지고, 집중이 흐트러지며 심신이 금세 지쳐버리는 경험을 자주 한다. 학창 시절, 강한 조명 아래 교실, 시끄러운 나이트클럽, 좁은 버스 안에서 큰 마이크 소리와 목소리 큰 학생들의 산만함은 나를 쉽게 지치게 했다. 반대로, 빗소리와 흐린 날의 조용한 환경에서는 마음이 차분해지고, 생각이 정리되며, 내적 몰입과 안정감을 느낀다. 교직 생활에서도 비슷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몰랐다. 직업상 견뎌야 할 것들로 나 혼자 속앓이를 했던 것 같다.

이러한 경험들은 단순한 기분이나 성격과는 다르다는 생각뿐이었다. 최근 종합검진에서 자율신경계 검사로 스트레스 검사를 받으며, 나의 신경 구조와 자율신경계 반응을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외부 자극을 더 깊게 받아들이는 고감각 민감형(Highly Sensitive Person, HSP) 성향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HSP는 뇌의 감각 처리 회로가 일반인보다 민감하여, 외부 자극이 과도하면 교감신경이 과도하게 활성화되어 피로, 주의 산만, 불안 같은 신체적·정서적 반응을 쉽게 경험한다.

실제로 나는 HRV(심박변이도) 검사에서 일반인보다 높은 부교감신경 활동으로 안정적 상태를 유지하며, 저자극 환경에서 차분함과 몰입이 용이함을 확인했다. 이는 비 오는 날이나 조용한 환경에서는 부교감신경이 활성화되어 마음이 차분해지고, 생각을 정리하며 몰입할 수 있는 내 특성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었다.

특히 2022년과 2024년에 받은 검사 결과는 내 삶의 변화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2022년, 34년의 직장을 떠나 새로운 일터에 적응하던 시기에는 불규칙한 근무와 누적된 피로로 교감신경이 과도하게 활성화되어 자율신경의 균형이 무너져 있었다. 안정도와 회복력이 떨어지고 피로도가 높게 나타난 결과는 그 시절의 고단한 생활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러나 2024년, 직장과 생활이 안정되자 검사 수치도 달라졌다. 자율신경의 균형이 회복되고 스트레스 저항도와 피로 지표가 개선되며, 부교감신경이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변화는 단순한 기분의 차이가 아니라, 나의 신경 구조가 환경에 따라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주는 과학적 증거였다.

그동안 '나는 왜 그럴까?'라는 질문에 나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고감각 민감성은 병이 아니라 전 세계 인구의 15~20%가 가진 타고난 기질적 특성 중 하나다. 나는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신경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환경에 따라 교감·부교감신경이 다르게 활성화될 뿐이다. 복잡한 환경에서는 피로와 산만함을 쉽게 느끼지만, 비 오는 날이나 조용한 환경에서는 부교감신경이 활성화되어 마음이 차분해지고, 생각을 정리하며 몰입할 수 있다. 이처럼 나의 민감성은 나에게 맞는 환경을 찾았을 때 더 큰 힘이 될 수 있다.

고감각 민감형들의 특징은 외부 자극 속에서 깊은 의미와 해결책을 찾는 것에도 탁월하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소리 속에서도 섬세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곤 한다. 지금도 9층 창문으로 들려오는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바퀴 소리가 그 어떤 음악보다 아름답게 흐르고 있는 것은, 단순히 소음에 대한 둔감함이 아니라, 차분하고 단조로운 소리를 뇌에서 매우 풍부하고 섬세한 감각으로 처리하기 때문이다. 시끌벅적한 음악회보다 비 오는 날의 창문 밖 소리에 귀 기울이는 나의 모습은, 외부 세계를 단순히 인지하는 것을 넘어 감정적으로 깊이 연결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HSP의 고유한 능력인 셈이다. 이러한 경험은 외부의 복잡한 자극으로부터 벗어나 내면으로 깊이 몰입하게 하고, 그 속에서 평온함과 안정감을 찾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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