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과 도시, 떠남과 머묾 사이의 이야기
삶에는 늘 갈림길이 있다. 누군가는 떠나야 했고, 누군가는 머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도시에서 시골로 건너왔고, 아이들은 시골에서 도시를 꿈꾸었다. 이 수필은 그 교차점에 선 시간들, 그리고 떠남과 머묾 사이에서 품게 된 흐이망(희망)에 관한 이야기다.
1986년 봄, 나는 첫 부임지를 받았다. 대학을 갓 졸업한 스물셋, 교단이란 이름 아래 섰지만 사실 부족한 것이 많았다. 그 마을은 이제 막 시로 승격된 곳으로 시내 가운데 강을 사이에 두고 양철 기와집이 즐비했다. 시내만 벗어나면 허름한 집, 낮은 문, 부엌과 찬장은 그릇 몇 개가 다인 닭 울음소리가 먼저 들리는 학교였다.
월요일 아침, 학급회비를 걷고 있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한 아이의 표정이 다른 날에 비해 어둡고 눈도 부어 보였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그 아이가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선생님... 오늘, 300원이 없어요.”
작은 목소리와 참지 못한 눈물. 바지 주머니에 꼭 쥔 손, 붉어진 얼굴, 마른 입술. 그 여학생은 교복 단추를 끝까지 채운 채 정색하며 말했다.
“내일은 꼭 가져올게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시에서 300원은 버스비 한 번, 분식 한 접시 값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아이를 울릴 만큼 큰돈이었다. 그날, 나는 교단에서 처음으로 가르침보다 ‘가슴앓이’를 먼저 배웠다.
유독 눈에 띄는 남학생 두 명이 있었다. P는 조용했고, 공부도 상위권을 웃돌았다. 그러나 추석이 지난 어느 날, 그는 더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서울에서 웨이터로 일하고 있대요.” 소문이 돌았다. 그는 추석 때 서울에서 내려온 중학교 동창을 따라 도시로 떠났다. 기회였는지, 탈출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가출이라고 불렀다. 그는 더는 교실 풍경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또 다른 남학생 J는 정반대였다. 장난기 많고 수다스러웠다. 매일 아침 조회하러 가면 칠판에는 늘 “신랑 J○○, 신부 한○○”이라는 낙서가 적혀 있었다. 나는 웃으며 지웠고, 그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써놓았다. 매일 아침 학급 친구들을 하객으로 한 ‘결혼식’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것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 현실을 견디기 위한 그만의 방식, 도시를 동경했지만 떠날 수 없었던 아이의 농담 같은 고백이었다. 하나는 가출로, 하나는 유머로. 그들 모두 도시를 향하고 있었다.
1991년, 나는 섬으로 부임했다. 강화도였다. 첫 아이를 출산한 지 2주, 부기가 채 가시지 않은 몸으로 강화교를 건너갔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염하강, 구불구불한 좁은 길, 담장 너머 앙상한 나뭇가지, 그리고 멀리 보이는 학교. 둥근 우물터를 중심으로 옛집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그곳에도 잊지 못할 제자 W가 있었다. 은행나무 아래 앉았던 어느 봄날, 그녀는 물었다.
“선생님,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스스로 답을 내놓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강화도를 떠난 지 15년 만에 다시 찾았다. 복숭아를 고르고 있던 내게 과일가게 여주인이 말을 걸었다. W였다. 앳된 모습은 사라졌지만 분명 그녀였다. “남편과 사내 결혼했어요. 구조조정 1순위로 남편은 남고 제가 사표를 냈어요.” 그 순간, 은행나무 그늘 아래 웃던 제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했던 말이 겹쳐졌다.
“강화에서 태어나, 강화에서 살다, 강화 남자를 만나, 평생을 강화에서 사는 여자요.”
답변 그대로라면 그녀는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어 내 앞에 서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손님들을 대하는 모습, 가게를 꾸려가는 당당한 태도는 불쌍함과 거리가 멀었다.
떠나지 못한 삶이 불쌍한 것은 아니다. 남는다는 건, 견디는 것이며 사랑하는 방식이다. 나는 첫 부임지 시골에서, 강화도에서, 그리고 수많은 교실에서 떠나는 아이들과 머무는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삶은 다리를 건너는 일이 아니다. 어쩌면 다리 위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흐이망은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우리를 지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