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아 씨, 잘 생각했어. 승아 씨는 더 높은 곳에서 훨훨 날 수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부장님. 그동안 잘 가르쳐주신 것도 감사해요."
"내가 뭐 가르친 게 있나, 승아 씨가 알아서 잘 배운 거지. 어디 가기로 한 회사는 정해졌나?"
"아니요. 아직 살펴보고 있는 중이에요."
"이건 추천서야, 어디든 필요할 때 첨부하게. 혹시 다른 게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구."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장님."
승아는 지난 재계약 후 1년이 지나고 연장 계약을 하지 않기로 정했다. 작년부터 정규직인 회사에서 일하길 권유했던 부장은 승아의 퇴사 소식에 서운해하면서도 잘 한 선택이라며 아낌없이 격려해 주셨다. 승아는 그런 부장에게 내심 미안했지만 모두 말할 수는 없었다. 퇴사 후 구직 활동에 뛰어들지 않고 바리스타 학원을 다닐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벌써 학원도 등록해 두었다. 자격증을 딴 후 유명 커피전문점 바리스타 모집에 지원하려는 생각이었다.
'작년에는 모집 공고만 보다 말았지만 올해는 망설일 이유가 없는 것 같아. 왠지 나에게 얽매인 모든 것들을 바꿔보고 싶어.'
바리스타 학원은 카페가 많은 ○○동 거리에 있었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모이는 곳이라 그런 듯하다. 승아를 가르치는 스승도 같은 거리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런 식의 삶도 있다니. 회사원에게는 새로우면서도 대단해 보였다. 회사원 타이틀이 사라진 인간 승아의 가치는 과연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불확실성이 주는 두려움 보다 오히려 뭐든 될 수 있다는 자유로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정해진 게 없어 더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카페 거리를 걷던 중이었다.
"미스토리님, 맞으시죠? 평일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앗, 미스터리우스님, 안녕하세요. 일하시던 가게가 이 근처였던가요? 저 요즘 퇴사하고 커피 배우거든요."
"아, 그러시군요. 많이 배우셨어요? 뭐뭐 만들 줄 아세요?"
"이제 초급은 떼서 웬만한 음료들 흉내 낼 줄은 알아요. 앞으로 맛을 살리는 게 더 중요하겠지만요."
"그럼, 진짜 실례인 거 아는데요, 저희 가게에서 일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사장 형이 다쳐서 입원한 지가 석 달인데, 직원을 못 구해서 제가 100일 동안 쉬는 날도 없이 일하고 있어요."
"그래서 요즘 도통 영상이 안 올라왔군요. 안 그래도 뭔 일 있으신가 하고 걱정했어요. 모임 안나간지도 오래돼서 여쭤보지도 못하고요."
"카페일이 바빠서 오프라인 모임도 못 열었어요. 미스토리님 안 나오신 지 얼마 안 돼서 사장 형이 다치고 그 후로 카페에 갇혀 살았거든요. 이러다 카페 지박령 되겠어요."
"아직 솜씨는 모자라지만 이런 비루한 손이라도 필요하시다면 보태드릴게요."
"진짜요? 정말 감사합니다, 미스토리님."
학원과 멀지 않은 곳에 미스터리우스가 일하는 가게가 있었다. 지난여름 영보와 함께 왔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가 시작이었지. 아니, 이미 마음속으로 끝을 냈던 때인지도 모르겠다. 방탈출 카페에서 우리의 과거를 보았고, 미스터리우스 카페에서 우리의 현재를 본 것이겠지. 그래, 이제 그만하자, 결심을 한 곳이 바로 이 카페일지도 모른다. 그런 곳에서 일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아직 커피 초보자일 뿐인 승아를 채용해 준다고 하니 승아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미스터리우스가 일하는 카페는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샌드위치가 유명해서 손님들이 많았다. 평일이라도 점심시간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동안 혼자서 샌드위치며 커피며 모두 만들려면 꽤나 힘들었겠네. 카페의 음료 메뉴를 얼추 익힌 후 승아는 커피 담당, 미스터리우스는 샌드위치 담당으로 일하였다. 손님이 몰려드는 실전에서 커피를 내리다 보니 학원에서 고상하게 배우던 것과는 천지차이였다. 간혹 손님이 뜸한 시간에는 미스터리우스와 격의 없이 대화할 수 있어서 좋았다. 모르는 가게에서 일하게 되었다면 쉬는 시간조차 편하지 않았을 텐데. 승아는 일하는 날이 늘어날수록 이곳이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게에서 미스터리우스라고 부르기는 뭐 하니까, 그냥 민호라고 부르세요."
"네, 저도 승아라고 불러주세요. 민호 씨는 유튜브 언제부터 다시 하실 거예요?"
"유튜브요? 음, 처음으로 열심히 해본 일이라 계속하고 싶긴 한데 사실 아이디어도 거의 동났고, 카페에 매여있다 보니 그림그릴 시간도 없구요. 이런 걸 다 이겨낼 만큼 간절하지는 않나 봐요."
"미추리님, 그러니까 진대리님도 이대로 채널 없어지면 너무 아쉽다고 걱정이세요. 저랑 진대리님은 라이트 하면서도 반전 있는 스토리를 정말 좋아했거든요. 혹시 아이디어 때문이면 이것 좀 보실래요? 저 회사 그만두고 시간이 남아서 틈틈이 써둔 거예요."
"오, 미스토리님은 오프라인 모임 때도 항상 좋은 글을 가져오셨었죠. 한번 볼게요."
"미스토리 아니고 승아요. 제 글이 쓸만하시면 민호 씨가 저녁에 조금 일찍 들어가셔서 그림 그리시면 어때요? 제가 한 시간 더 일할게요. 일당만 더 챙겨주신다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라는 말씀이시죠? 슬쩍만 봐도 주제가 참신하네요. 그럼 미안해하지 않고 제안 받아들여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오히려 제가 고마운걸요, 미스터리우스 유튜브가 다시 열린다는 게. 구독자들도 엄청 좋아할 거예요. 누이랑 매부뿐만 아니라 온 가족, 이웃들까지 좋아할 일이라구요."
얼마뒤 민호는 미스터리우스 유튜브에 새로운 영상을 올렸다. [글 작가 : 미스토리]라는 자막도 달았다. 예전처럼 자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꾸준히 영상이 올라오자 휴지기에 떠났던 구독자들도 점점 돌아오기 시작했다.
"승아 씨 덕분이에요, 모두. 아이디어가 떨어져서 난 이대로 끝인가 보다, 싶었거든요. 이렇게 글 작가에게 도움을 받아도 된다는 생각은 혼자서라면 절대 못했을 거예요."
"글 작가로 인정해 주시고 수익도 배분해 주시고. 민호 씨가 쌓아 올린 인기에 숟가락만 올렸는데 이렇게 챙겨주시니 고마워요."
"카페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선뜻 도와주시고, 이젠 유튜브 복귀까지 도와주셨으니 당연히 챙겨야죠. 이제 저희는 한 배를 탄 겁니다."
"사장님도 돌아오셨으니 앞으로 유튜브에 더 집중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카페에서 사람들을 살펴보는 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기에 좋더라고요. 일하면서 틈틈이 많이 써놓을게요."
"이참에 채널명도 [미스토리우스]로 바꿀 거예요. 괜찮으시죠, 미스토리님?"
"와, 정말 영광이네요. 괜찮고 말고요."
야군은 요즘 승아를 보며 참 괜찮은 날들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고양이 묘생 이제 6년 차지만 그간 이리저리 회사를 옮기면서도 괜찮다고 구는 승아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왜 저리 울상인 채로 더 큰 건물을 찾아 헤매나. 다른 인간 때문에 몇 날 며칠 울어댈 때는 정말 같이 있기 힘들었다. 쉬지도 않고 커다란 캣휠만 시끄럽게 돌려댔었다. 그래놓고 '괜찮아, 다 잘된 일이야.'라고 어찌나 중얼거리던지. 하지만 야군은 안다. 진짜 괜찮은 날의 승아는 절대 괜찮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걸, 자신의 앞발을 잡아보려 하지 않는다는 걸. 그래서 요즘 거울을 보며 뭔가를 중얼거리지도 않고, 야군의 앞발엔 관심도 없는 승아가 참 괜찮은 날들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군. 달빛을 받은 벚꽃나무의 그림자가 방안 가득 드리웠다. 야군은 늦은 시간에도 토독토독 연신 키보드를 두드려대는 승아의 뒷모습을 보며 냐아암 긴 하품을 하고는 잠을 청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