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끝이 쨍할 만큼은 아니지만 옷 속으로 스며드는 추위는 반갑지 않은 손님을 맞이한 것처럼 불쾌한 느낌이기도 한 것은 나이를 먹으면서 느껴지는 기분이다. 그래도 창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은 봄인 양 따스해서 괜히 게으르고 싶어 진다.
시간도 정오를 향해 가는데 이 눈 시린 햇빛이 아까워 그간 미뤄 두었던 신발장 정리를 해볼 요량이었다. 내 키를 훌쩍 넘기는 신발장 문을 열자 빽빽이 꽂힌 신발들이 나도 모르게 한 숨을 내쉬게 한다. 식구는 셋인데 신발은 몇 켤레 인지 알 수 도 없게 비좁게 살고 있다.
요즘 생활의 트렌드 중에 미니멀리즘 이란 게 있다. 단순함을 추구하는 예술로부터 출발한 단어라는데 그 어원이 무엇이건 비움으로써 정리를 해나가는 그 행위가 좋아 나도 신발장을 비워내 보기로 했다.
의자를 밟고 올라선 위칸엔 언제 적 샀는지 기억도 없는 등산화랑 갈색 운동화 그리고 비슷한 모양의 단화와 슬리퍼들이 웅크리고 있다. 그 아래칸도 그 다음칸도 별 반 다르지 않은 비슷한 모양의 신발들이 열 맞춰 줄 맞춰 얌전히 앉아있었다.
어떤 것은 어떤 추억 때문에, 어떤 것은 선물로 받았다는 이유로, 어떤 것은 그저 고가라는 이유로 찬찬히 들여다보니 버려서 정리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버리기엔 너무나 아까운 것 투성이었다. 나는 이토록 물욕이 넘치는 인간이었나 보다.
그런데 비워서 가벼워진다는 것은 비단 물건에 국한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켜켜이 쌓인 마음의 감정 덩어리들이야말로 진정 털어 내야 할 것 들이다. 살아가는 관계 속에서 소소하거나 혹은 소소하지 않거나 마음 상하지만 드러내지 못하고 쌓아두는 감정들이 많아진다. 모두 꺼내 일렬로 세워보면 사실 깃털만큼도 되지 않는 것도 있을 터이고 돌덩이만큼 한 것도 있으리라.
어제 도로에서 갑자기 끼어든 예의 없는 자동차 주인에게 혼잣말로 악다구니를 퍼 부우며 상했던 맘이 그렇고, 며칠 전 아이 문제로 통화했던, 얼굴도 본적 없는 같은 반 엄마의 속을 알 수 없다고 느꼈던 대화가 그렇다. 어디 그뿐일까. 배려를 가장한 말로 곱지 않은 속마음을 빤히 내비쳐 보였던 어느 모임에서의 불쾌했던 기억들이 마치 명치끝에 걸려 소화되지 못한 음식처럼 콕 걸려있는 것이다.
어떻게 비워야 할 것인가.
'당연히 그때는' '아마 나였더라도' 이런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이해하고, 거창하게 종교라는 이름을 빌어 용서하며, 인간으로 마땅히 가져야 할 측은지심을 가져보자고 노력해보았다. 그러나 결국 이해보다는 그때의 서운함이 먼저 앞서고 역지사지의 마음보다 불쾌한 마음이 자꾸 커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옹졸하기 그지없는 마음으로 괜히 머리마저 무거워지는 것이다.
결국 나는 아까워서, 아쉬워서, 추억이 아련해서 라는 이유로 한 켤레의 신발도 정리하지 못했고 옹졸한 마음에 끝끝내 이해되지 않는 이미 상해버린 감정을 한 톨도 털어내지 못했다.
신발장 문을 닫고 돌아선 거실엔 눈 시리게 빛났던 햇살이 우리 집에 무얼 비워냈는지 저만치 물러가 그사이 해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