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어머니께선 찬바람이 아직 기승을 부리는 아침, 벌교에 가셨다. 차도 없이 왕복 2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가려면 운전해 줄 사람을 찾아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고, 점심으로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이라도 대접해야 했지만 개의치 않고 벌교 행을 택했다. 그곳에는 바닷속 포근한 모래 밑에서 부지런히 자란 꼬막이 망태에 담겨 켜켜이 쌓여 있을 터였다.
어렸을 때부터 익히 들어온 어머니의 철칙이 있었다. 제 곳에서 잘 자란 놈을 제철에 먹는 것. 그때가 가장 맛이 좋았고, 영양가도 풍부했으니까. 어머니께서 굳이 벌교까지 가신 게 충분히 납득 됐다.
어머니께선 너무 작지도, 크지도 않은 적당한 씨알의 꼬막을 골라 집으로 돌아오셨고, 커다란 플라스틱 대야에 꼬막을 붓고 꼬막 껍데기에 달라붙은 바다의 흔적들을 떼어냈을 것이다. 비비고 문대고 물을 쏘며 꼬막 헹군 물에 더 이상 흙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몇 번이고 같은 동작을 반복했을 것이다. 그 행위를 몇 번이나 반복하셨을까 곱씹다가 어쩌면 어머니께선 그 뿌예진 물에 상념 몇 개, 고민 몇 개도 흘려보내지 않으셨을까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인내심 가득한 음식을 만들기 위한 모든 과정을 감내하기는 힘들었을 테니까.
딱 한 번, 어머니와 함께 꼬막무침을 만들 때 어머니께선 당신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싶으셨던듯 내게 설명해 주셨다.
꼬막을 씻을 땐 요령이 있단다.
껍데기 주름 사이에 묻은 모래를 씻어내려고 많은 힘을 주면 껍데기가 부서지기 쉽지.
그렇다고 너무 부드럽게 문지르면 꼬막 주름 사이의 모래가 떨어지지 않으니, 껍데기가 부서지지 않고 모래는 떨어지는 적당한 힘을 줘 꼬막끼리 문질러야 뻘이 씹히지 않는 꼬막을 얻을 수 있어.
한번은 바지락을 씻다가 힘을 많이 줘서 깨진 바지락 껍데기에 손가락을 벤 적이 있었다. 그때 어머니께서 해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바지락이라고 꼬막과 뭐 달랐을까. 사람 일이라고 꼬막과 뭐 달랐을까.
뭐든 적당해야 하는데…….
그러나 뭐든 적당히 하는 것의 기준이 남들보다 높았던 어머니의 피를 물려받은 나 역시 적당히 할 줄을 몰랐고, 어느 정도가 적당한 수준인지는 더더욱 몰랐다. 그래서 하루에 두세 번 집안을 쓸고 닦았던, 악착같이 돈을 벌어 자식들을 키웠던, 적당과는 거리가 먼 어머니의 삶을 보고 자란 딸은 어떨 땐 똑같은 모습으로, 어떨 땐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고 있었다. 전자는 어쩔 수 없었고, 후자는 거부하고 싶었던 발악의 결과랄까.
하지만 이제 어머니의 나이와 체력은 적당을 넘어서는 순간을 포기할 수 있는 여유를 선물했을 것이다. 선물로 받아야만 했던 여유 덕분에 어머니께선 조금 더 일찍 꼬막 씻기를 마무리 하고 굽힌 허리를 토닥거리셨을 것이다. 어머니께선 이제 꼬막 주름 사이에 약간의 회색빛이 돌아도 눈 감을 줄 아는, 꼬막 껍데기가 부서지지 않을 정도의 힘을 가할 줄 아는 그 적당함을 가진 사람으로 평생 사시지 않을까. 그리고 언젠가 나에게도 적당히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둘씩 늘어나겠지.
꼬막 껍데기를 적당히 잘 씻었다면 이제 꼬막을 삶아야 한다. 꼬막을 솥에 붓고 마찬가지로 꼬막이 적당히 익을 때까지 한 방향으로 저으며 꼬막이 골고루 익도록 해야 하고, 꼬막을 손쉽게 먹기 위해선 알맞게 익은 꼬막의 껍데기 한쪽을 떼어내야 한다. 본격적인 인내의 시간이다.
가막만의 꼬막 산지에서는 꼬막을 키우기 위해 꼬막의 산란기부터 인간이 개입한다고 했다. 촘촘한 그물에 바닷물 속에 부유하던 수정된 꼬막이 걸리면 그 자리에서 자라도록 했다가, 꼬막이 새끼손톱만큼 자라면 꼬막이 좋아하는 바다 환경이 있는 곳으로 옮겨와 꼬막을 흩뿌리고, 새끼 꼬막은 그곳의 모래 속에서 몸집을 키워 비로소 엄지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자란다. 참고 기다리며 키운 꼬막이니 인내심은 필수다. 인내심을 가지고 꼬막을 씻고 삶고 껍데기를 까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먹을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어머니께선 따뜻하게 삶아진 꼬막 한 바구니를 거실 바닥에 내려두고 꼬막 껍데기를 까기 시작했을 것이다. TV에서 재미있는 프로그램이라도 하면 다행이고, 앞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있다면 더 다행이었겠지만, 텅 빈 집은 겨울 풍경처럼 썰렁했고, 눈 오는 날처럼 고요했을 것이다. 팔뚝으로 타고 흐르는 짭조름한 꼬막 국물의 따가움을 견디며 어머니는 한 쪽 껍데기를 잃은 꼬막을 켜켜이 쌓아 올렸다.
어머니와 꼬막무침을 함께 만들 때보다 훨씬 더 어렸을 때, 꼬막의 끝부분에 숟가락을 가져다대고 비틀 때마다 저항없이 분리되던 꼬막의 껍데기를 보며 신기해했던 나는, 하나씩 껍데기를 벗는 꼬막을 날름날름 받아먹으며 적당히 따뜻하고 짭조름한 꼬막의 맛을 즐기곤 했다. 양념을 하지 않아도 맛있는 꼬막은, 어머니 표 양념을 만나면 더 맛있는 반찬으로 탈바꿈할 것이었다. 꼬막의 신분 상승. 어머니의 손맛엔 그런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날, 거실에 덩그러니 앉아 꼬막 껍데기를 분리하는 그 시간엔, 따뜻한 꼬막을 날름날름 받아먹던 그 작은 입들은 없었다. 그 작은 입들은 모두 제 살길을 찾아 떠났으니까. 따뜻하게 삶은 꼬막을 주전부리 삼아 먹는 시간도, 함께 꼬막무침을 만든 시간도 쉬이 오지 않을 일상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작은 입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탱탱하고 부드러웠던 꼬막의 맛을, 맛있게 양념 된 꼬막과 따뜻한 밥 한 술을 먹었을 때의 감동을.
이제 작은 입들은 꼬막이 그리워질 것이고, 그 맛과 시간이 그리워서 꼬막을 해달라는 말을 어리광처럼 부리고. 어머니께선 세상이 이렇게나 빨리 바뀌어도 변하지 않은 입맛이 고마워 모든 인내의 시간은 감내하며 꼬막을 씻고, 삶고, 껍데기를 깠을 것이다.
꼬막 탑을 쌓았다면 이제 꼬막이 무침이 되는 마지막 관문이 남은 셈이다. 어머니께선 절대 꼬막의 껍데기를 모두 분리하지 않았다. 껍데기를 모두 떼어내면 아랫부분에 놓인 꼬막이 간장양념에 푹 담겨 간이 고르지 않고, 꼬막살도 눌린다며 꼭 한쪽 껍데기는 남겨두었다. 비록 먹을 때 껍데기를 추려야 하는 불편함은 있었지만, 그건 거부할 수 없는 어머니의 또 다른 철칙이었고, 그 철칙 덕분에 껍데기를 다 벗은 꼬막을 보면 어딘가 어색함을 느끼는 내가 되고 말았다.
어머니께선 그릇에 꼬막을 한 면 깔고, 그 위에 양념장을 조금씩 떠서 동일하게 뿌린 뒤 다시 꼬막을 한 면 깔아서 양념장 뿌리는 일을 반복하며 꼬막무침을 완성했다. 간장양념을 꼬막 위에 쏟아붓고 손으로 뒤적거리며 무치는 꼬막무침이 아닌, 꼬막 하나에 수저 한 번, 수저 한 번엔 양념장에 썰어놓은 야채들이 골고루 담겨 있도록. 그렇게 꼬막 하나하나에 간장양념을 뿌려야 어머니 표 꼬막무침이 완성된다. 아, 물론 진짜 완성은 맨 위 꼬막에 특혜처럼 뿌려지는 통깨였지만.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꼬막무침을 향한 여정은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고 나서야 끝났다. 그리고 남은 건 꼬막무침을 담은 반찬통 3개와 꼬막 껍데기가 수북이 담긴 쓰레기봉투 하나. 이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어머니께선 꼬박 한나절을 보냈지만, 꼬막무침은 그 작았던 입속으로 들어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과 어울려 하나의 이야기가 되고 맛이 되고 힘이 될 것이다. 다른 시간, 다른 식탁에서 꼬막무침을 먹더라도 꼬막 한 알을 입속에 넣어 씹으며 그 속에 담긴 어떤 것들로 작은 입들은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고, 과거를 추억할 것이다.
그리고, 영원하길 바라는 어머니의 목소리.
“꼬막무침 해놨어. 집에 와서 가져가.”
(그리고 지금은)
“꼬막무침 맛있게 됐더라. 택배로 보내줄게.”
꼬막의 제철이 여름이 아닌, 찬바람 강한 겨울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무사히 집으로 배달된 꼬막무침을 입 안에 넣으며 그 짭조름한 양념에 담긴 짭조름한 인생의 맛을 어렴풋이 느끼는 어느 겨울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