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를 채우는 일상에 대하여
누군가가 당신이 밥은 먹고 다니는지 궁금해한다면 그가 그만큼 당신을 가깝고 소중하게 생각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식사하셨냐고 가볍게 묻는 그런 질문 말고, 밥은 안 먹었다고 하면 큰일이 날 것만 같은 표정과 말투로 묻는 그런 질문.
못 먹고 사는 형편이 아니고,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도 아닌데, 엄밀히 따지면 먹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워서 문제인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엄마는 항상 밥은 먹었냐고 물으신다. 당신 딸이 아침을 건너뛰기 시작한 게 이미 십수 년 전인데도 말이다.
1년의 절반 이상을 1일 1식으로 보낸 지 몇 년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시게 되면 기함하실 것 같아, “나, 아침 안 먹잖아”라는 말로 얼버무리며 얼른 화제를 전환한다. 그런데 또 여기서 전환되는 주제가 다시 ‘밥’이다. ‘식사는 하셨어요? 뭐에 드셨어요? 잘 챙겨 드셔야지. 왜 이렇게 부실하게 드세요’ 하는.
공수가 전환된 김에 내가 듣고 싶지 않았던 밥과 관련된 잔소리를 엿가락처럼 길게 늘여놓는다.
혼자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어머니의 식탁에는 반찬이 하나둘씩 줄어들었다. 나물이며, 국이며, 구운 고기며 생선까지. 젓가락 들를 곳 많았던 엄마의 밥상은 이제 국 하나, 김치 두어 종류가 전부일 때도 있는 눈치다.
잘 챙겨드셔야지, 그렇게 부실하게 드시면 안돼요, 라고 다시 잔소리를 하다가, 이렇게 말하는 나는 무엇을 먹었는지 떠올려 본다.
견과류 1봉, 두유 1팩, 바나나. 어느 날엔 빵이나 달걀. 그리고 또 어느 날엔 쿠키 서너 개. 그리고 물처럼 달고 사는 커피 한 잔. 이어서 또 한 잔.
이렇게 먹고 사는 걸 들은 누군가는 “잘 챙겨 먹어야지. 그렇게 먹으면 안돼. 한국인은 밥심이야!”라며 내가 엄마에게 그랬듯 나에게 잔소리를 한다.
한국인은 밥심이라는데, 밥심은 어떻게 먹어야 나오는 걸까.
밥과 국, 밑반찬이 깔린 밥을 먹어야 밥심이 나는 걸까. 밥, 그러니까 말 그대로 쌀밥을 먹어야 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쌀밥의 주요 영양소는 탄수화물이니 탄수화물을 먹으면 밥심이 나는 걸까.
내게 한국인은 밥심이라고 말했던 그에겐, 적어도 두유, 견과류, 바나나, 삶은 달걀로 채우는 한 끼는 밥심의 원천은 아닌 게 분명하다.
그러나 잘 차려진 식사가 아니어도, 아니, 견과류와 바나나로 잘 차려진 한 끼로 밥심 내는 흉내를 꽤 오래 해오고 있는 걸 보면, ‘한국인=밥심’이라는 공식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는 환상 같은, 신화 같은 것이 아닐까.
밥을 밥답게 먹어서 힘이 나는 게 아니라 든든히 먹었으니 힘이 날 것이라는 마음의 위로에서 비롯되는 밥심의 신화.
밥심은 한 입 두 입 밥을 먹고, 반찬을 집어 먹는 동안 위로와 용기를 삼키고, 온기와 여유를 섭취하며 생겨난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12시를 넘기기도 전에 허기가 졌고, 평소에는 위장이 아직 깨어나지도 않았다며 거부했을 시간에 밥상을 차렸다. 현미와 잡곡을 넣은 밥 한 공기와 육아 필수 반찬 중 하나인 조미김 한 팩, 그리고 빠질 수 없는 김치. 조촐하게 차려진 한 상을 먹으며 허기짐을 채웠다.
허기가 지는 건 배가 고픈 것과는 다르다.
배고픔은 일정 시간동안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 느끼는 공복감에 의해 기인하며, 약간의 요기로도 채워지지만, 허기짐은 불과 5분 전에 식사를 마쳤어도 느낄 수 있다.
위장이 비어서 느끼는 감각이 아닌, 다른 어딘가가 비워져서 느끼는 감각. 마음 어딘가에 무엇 때문인지 구멍이 생겨서, 무언가가 자꾸 까끌거려서,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갈증 같은 것이 생겨서 허기짐을 느낀다.
육체적 허기짐이 아닌 심리적 허기짐. 원인이 애매모호한 감정이 찾아왔을 때, 옳은지 틀린지 아리송한 방법으로 달래본다.
따끈한 밥에 묵은지를 올려 김으로 감싸 먹으면 그 맛이 제법 좋아서 마음의 허기짐 같은 것이 슬쩍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짜지 않게 맛있는 정확한 밥 양과 김치 크기를 찾는 것에 몰두하게 된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젓가락질을 이어가며, 아직 위에 남아있는 것 같은 야식의 흔적을 밀어낸다.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인 손놀림 덕분에, 심리적 허기짐이, 육체적 허기짐을 대하는 방식으로 약간은 해소된다.
어린 내가 밥을 먹기 싫어할 때면 따뜻한 밥을 까만 김 안에 넣어 입 안에 넣어주었던 엄마와의 추억이 담긴 김, 언제나 갓 지은 밥을 먹이기 위해 매끼 밥을 안쳤던 정성이 담겨 있는 쌀밥, 그런 순간마다 상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김치까지.
흔하디흔한 반찬에 추억 몇 개가 더해지고, 의미 몇 개가 덧붙여지면 그것이 곧 힘의 원천이자 어디에 내놔도 밀리지 않는 진수성찬이 되고, 영양소가 골고루 갖춰진 식단과는 거리가 먼 조촐한 상이 밥심의 원천이 된다. 어느 날, 평소와 다르게 찾아온 허기는 조촐하게 차려진 진수성찬 앞에서 자취를 감추고, 어느덧 포만감으로 대체된다.
몸이 아파도, 마음이 아파도 가장 먼저 내려놓는 게 숟가락 아니었던가. 어딘가 아프고 정상이 아닐 땐 식욕도 허기짐도 모르고 지내다가, 전환의 기미나 의지 같은 것들이 생기면 그제야 출정식을 하듯 밥을 우걱우걱 쑤셔 넣으며 달라진 내 모습을 보여주겠노라 다짐하고는 하지 않았던가.
결국 허기짐은 비어있음을 알아달라는 신호이고, 부족한 것을 채워달라는 신호이며, 여기서 멈춰 있지 않고 움직이고 싶다는 신호인 것이다.
양푼 비빔밥이든, 간장 계란밥이든, 아니면 김과 김치와 조합으로든 허기짐을 해소하고 나면 불끈 힘이 나고 의욕이 생긴다. 먹어야 힘이 나고, 힘이 나야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까. 힘이 나야 나를 돌보는 것도, 빈 구멍의 원인을 찾는 것도, 어딘가에 하소연하며 가볍게 하는 것도 가능하니까.
밥은 힘이 되고, 밥심은 의지가 되어, 밥심의 신화는 이렇게 이어지고, 앞으로도 쭉 이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누군가의 식사 여부를 그렇게 열심히 챙겼고, 앞으로도 여전히 그러할 것이다.
‘밥은 먹었어? 한국인은 밥심이야. 든든히 챙겨 먹어야지. 저녁이라도 잘 챙겨 먹어!’
매번, 식사 여부를 묻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해, 식사를 잘 챙겨 먹으라는 당부로 대화를 끝내는 패턴. 오랜만에 만난 지인에게 언제 밥 한 끼 먹자는 찾아올 일 요원한 약속까지.
이 단조로롭고 예상 가능한 패턴 속에는, 배를 채우듯 마음을 채우고, 밥을 먹어 든든함을 느끼듯 마음도 든든히 하라는 속뜻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의식주 중 식(食)에 해당하는 밥.
밥은 인간이 살 때 없어서는 안 될 기본 중의 하나이기에 그것을 살뜰히 챙기고 궁금해하는 것은 상대의 생사를 확인하는 일이다. 육체의 생사와 마음의 생사. 그 모든 것의 안녕함을 확인하는 일이다.
결코 흔하지 않고 사소하지 않는 존재를 향한 관심과 애정. “밥은 먹었어? 잘 챙겨 먹어!”라는 말에는 이 관심과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오늘도 애정을 듬뿍 먹었다. 모처럼 몸도, 마음도 든든히 채운 오늘이다.
“식사는 하셨나요? 저녁 잘 챙겨 드세요.”
(이미지 by eunyoung LEE from Pixabay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