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과 최고는 다른 거니까
이게 최선이야?
이 말을 습관처럼 했다. 앞에 사람 이름이 내가 되었다가 타인이 되었다가, 육성으로 나왔다가 마음속으로 되뇌다가. 참 다양하게 시도 때도 없이 쓰는 말이었다.
이게 최선이냐고 습관적으로 묻는 나에 대해 표현하는 방식이 이게 최선인지, 문득 글을 쓰면서도 떠올랐지만, 지금은 그 생각에 대한 답을 정하는데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쭉 글을 써내려가고 있다.
생각이 생각을 검열하는 습관을, 적어도 글을 쓰는 동안에는 하지 말자고 생각하며 글을 쓰지만, 한 페이지를 다 채우고 나면, 저 위, 아니면 그 위 어딘가에 천을 기워놓은 듯한 흔적이 있다. 취소를 의미하는 죽죽 그어놓은 선 두 줄, 혹은 비뚤어진 그물망처럼 촘촘히 그어진 곳 위에 다른 단어로 대체한 표현이 자리잡고 있다.
나는 습관적으로 최선을 찾고, 어떨 때는 최선이 아닌 차선을 찾고, 적확한 무언가를 집어 넣기 위해 부지런히 뇌를 움직이는 사람이구나. 하지만 그렇게 써도 어딘가 부끄럽고 민망스러워서 고치고 또 고치기를 반복한다.
그래도 부족하겠지만, 최선을 다했다는 문장 앞에서 떳떳하고 싶으니까.
첫 책에서, 나는 오랫동안 완벽주의자의 습성을 가지며 살아왔고, 그 습성으로 인해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떻게 겁쟁이가 되어갔는지를 고백했다. 그러나 그 습관은 아직도 여전히 내게 남아있다. 다만 바뀐 것이 있다면 이제는 조금 덜 괴로울 뿐.
이 과정에서 내가 최선과 완벽에서 조금 자유로워졌을지 몰라도, 내 주변을 머무르는 누군가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한번은 설거지를 마친 남편에게, 그리고 또 한번은 빨래를 개는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이 와중에 ‘나도 모르게’ 라고 썼다가 쓱쓱 지웠다. 무의식중이라고 면죄부가 주어지는 건 아니니까.) 여튼 무의식이든 다분히 의식적이든, 그게 최선이냐고 물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고, 그 속에 담긴 의미야 나는 알고 있을 터였다.
굳이 변명하자면, 자고로 설거지란 음식이 담겼던 흔적이나 세제가 묻은 수세미로 닦은 흔적이 없는 행위이고, 빨래를 개는 것은 주름이 없도록 접어 어딘가에 넣어둬야 끝나는 행위 아니던가. 그런데 남편의 설거지 끝에는 고춧가루와 밥알이 달라붙어 있고, 갠 빨래는 주름이 가득했다.
저 꼴을 보고 있노라면 이것이 최선인가 하는 의문이 저 밑에서 솟아오른다. 지금 상태 이상을 바라는 것이 나의 욕심인지, 내 기준이 유난히 엄격한 것인지 하는 의심까지도.
이게 최선이냐고 묻는 말에, 남편은 “응, 그럼 어떻게 더 해?”라며 천진하게 물었다. 그 작은 눈이 똘망똘망해지는 것을 보면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거겠지.
최선을 다해도 최선 같아 보이지 않았던 때의 나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최선’을 ‘최고’라는 단어와 혼동하며 사는 동안, 최선을 다했어도 고춧가루는 묻어 있을 수 있고, 주름이 잡혀있을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최선을 다했어도 사랑이 끝날 수 있고, 최선을 다했어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몰라서, 더 하라고, 더 나아지라고 다그치며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고, 또 채찍질을 해댔다. 그러나 최선이 최고의 보증수표는 아니기에 가끔은 넘어지고 가끔은 그동안의 과정이 수포로 돌아가기도 한다.
이게 최선이야?
최선이냐고 묻는 말의 이면에는 최고가 아니면 안된다는 의미가 깔려 있었다. 그래, 그래서 나는 괴로웠다. 열심히 해도 인정해주지 않아서, 저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무의미해져서, 나의 최선이 최고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서.
그래서, 당신도 괴로웠을까. 자꾸만 최고가 되길 종용하는 것들 때문에 지쳐버렸을까. 그렇다는 대답을 들을까 두려워 차마 묻지 못하고, 최선이냐고 묻는 행위를 그만두기로 다짐했다.
내 최선이 최고가 될 수 없음도 알고, 네 최선이 내 최선과 같지 않을 수 있음도 알고 있으니까.
(이미지 by MLARANDA from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