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엄마는 당신의 엄마와 왕래가 거의 없었기에, 어린시절 할머니와 고모는 내가 보고 자란 ‘어른 엄마’와 ‘어른 딸’의 표본이었다. 고모는 항상 우리 집과 가까이 살았다. 아니, 우리가 항상 고모네 근처에 집을 얻었다는게 더 맞는 표현이다. 학교 갔다 집에오면 고모는 할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둘의 대화는 허공에 외치는 소리와 같았다. 마치 서로 닮은 평행선이 교차점 없이 각자의 소리만 내는 그런 양상이랄까. 너무나 똑같은 두 사람은 그저 각자 하고 싶은 말들을 동시에 내뱉었다. 살가운 대화가 오가진 않았지만 어린 내가 보기에 둘은 서로를 꽤 사랑했다.
고모는 ‘효녀’ 였다. 시간과 물질을 아끼지 않고 엄마에게 딸로서 해야할 책무를 다했다. 할머니는 항상 내게 고모 칭찬을 했다. 저런 딸이 없다며 고모의 착한 마음씨와 영리함을 칭찬했다. 어린시절 고모가 자신과 나이가 같은 삼촌에게 반말 한번 안하고 얼마나 공손히 행동했는지, 학창시절 얼마나 공부를 잘했는지, 할아버지 돌아가시는 길을 큰 딸로서 어떻게 잘 보내드렸는지. 그 얘기들의 종착지는 항상 고모가 대학만 갔으면 지금 장관은 됐을 거라는 후회로 끝났다. (행정부의 고위관직 그 장관이 맞다.) 이 모든 얘기를 난 이십년간 반복해서 들었고, 할머니는 이 칭찬을 고모 앞에서 꺼내진 않았다.
할머니는 고모가 집에 올때면 반찬이며 채소며 바리바리 챙겼다. 집에 반찬을 담을 밀폐용기가 부족할 때면 고모가 반찬을 주면 통을 안가져 온다고 그렇게 성질을 냈다. 난 솔직히 그깟 통이 뭐라고 더 사고 말지 그걸로 몇 년간 반복해서 성을 내는 할머니가 이해 되지 않았다. 여하튼. 그만큼 고모는 반찬통 반납을 더디게 하는 것 말고는 정말 흠잡을 곳 없는 딸이었다.
어린 내가 할머니와 고모를 통해 경험한 ‘친정’이란 곳은 이러하다.
약속도 않고 편하게 와서 쇼파에 핸드백 툭 던져 놓고 남편과 자식 욕 실컷하다, 엄마는 살림을 왜 이렇게 하냐 요즘 애들은 이런거 싫어한다, 너는 왜 그러냐 니가 너무 세서 남편이 힘들다며 서로 잔소리 하고. 그러다 마지막엔 두 손 가득 반찬을 받아가며 주는 사람도 통 좀 가져오라 성질내고 받는 사람도 필요없다 짜증내는. 뭐 그런 거였다. 난 항상 그들의 대화를 옆에서 들었다. 또래 친구들과 노는 것 보단 아무것도 모른단 표정을 한 채 옆에 앉아 이 어른들의 대화를 듣는게 더 좋았다.
내가 볼때 우리 고모는 정말 최고의 딸, 최고의 고모였다. 큰소리로 서로 할 말만 하다 집에 갈때쯤엔 핸드백에서 길다란 지갑을 확 꺼내 내게 용돈을 촥 주던 고모란. 정말 멋진 여성이다.
우리 엄마의 유방암 진단 이후, 어린 내가 차마 느끼지 못한 할머니와 고모 사이의 상처들이 어설프게 엉겨진 살을 비집고 드러났다. 할머니는 고모 때문에 자신이 순천에 내려가게 됐다 생각했다. 하나뿐인 딸년이 자기 편이 되지 않고 남의 편만 든다며 늙어감이 야기하는 모든 비극을 오롯이 제 딸에게 쏟아냈다. 자기연민과 우울감에 젖어 폭언을 일삼는 할머니 앞에서 나이 든 고모는 어린시절 억세고 매서운 엄마 앞에서 겪었던 꼬마의 무력감을 느꼈다.
우리 할머니 순심씨는 “아이구 내 새끼” 라는 표현 한 번 없이 삼남매를 키웠다. 물론 손주들에게도 그 흔한 “우리 강아지”, “우리 애기” 이런 애정 표현을 일절 하지 않으셨다. 내가 할머니께 어릴 적 들은 최고의 칭찬은 “개보다 낫다” 였다. 뿐만 아니라 할머니는 자신에게 팔짱을 끼거나 껴안는 등의 행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의 몸에 누군가의 무게가 얹어지는 것도, 또 자신이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것도 용납될 수 없었다.
다만 예외는 있었다. 할머니의 발톱은 고된 일로 뭉개지고 너무 두꺼워져 스스로 자를 수 없었고 그 두꺼운 발톱을 잘라주는 건 보통 우리 엄마의 역할이었다. 하루는 우리 엄마가 바빠 발톱을 미처 못잘라 드렸는지, 할머니가 고모에게 그 부탁했다. 훗날 고모는 이 날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엄마 발을 잡는데 목욕탕에서 생전 처음 본 노인 발을 만지듯 너무나 낯설었다고.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어렸을때 엄마와의 스킨십, 다정한 추억이 없이 자라서 그런거 같다며, 자신은 엄마가 너무 무서웠다고. 그렇게 할머니의 다 큰 딸은 미처 자라지 못한 꼬마의 기억을 안고서 자신 또한 할머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