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는 자그맣다.
할머니는 고모가 어릴 때 젖을 못 먹고 커 키가 미처 자라지 못했다는 말을 자주 했다. 고모가 태어난 해, 나의 작은할아버지도 태어났다. 이 말인 곧 할머니와 증조할머니, 그니까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같은 해 아이를 낳았다는 거다. 그렇게 고모와 작은할아버지는 쌍둥이처럼 함께 자랐다. 다만 그 사이엔 깍듯한 위계가 있었고, 고모는 자신과 나이가 같은 삼촌을 삼촌이라 불렀으며 지금까지 존댓말을 한다.
할머니는 모유가 나오지 않는 시어머니를 대신해 그의 아들을 먹였고, 그렇게 다 먹이고 나면 더 이상 젖이 나오지 않아 자신의 딸에겐 쌀을 끓여 그 물을 떠먹였다.
고모의 그 작은 몸은 성한 구석이 없다.
오늘날 고모집에 가면 새로운 통과의례가 있다. 고모의 목과 어깨를 주무르고 풀어줘야 한다. 고모의 허리는 측만이 심하고 그 통증은 두통까지 이어진다. 우리 아빠가 나고 자란, 고모의 고향, 순천시 응령리 상사면은 지금도 순천 시내에서 차로 십여분 들어가야 나오는 산골에 있다. 고모는 한쪽 어깨에 보따리를 두르고 지금은 찻길이 난 동네 뒷산을 두 시간가량 걸어 시내에 있는 중학교에 다녔다. 고모는 그때 한쪽으로 가방을 메고 다녀 자신의 척추가 다 휘어 버렸다 한다.
그 산에서 고모는 책을 읽고 시를 썼다. 집이 아닌 나무 밑에 앉아 사색에 잠긴 그 시간이 고모는 좋았다. 어릴 적 삼대가 복잡히 얽혀 사는 시골집엔 고모가 맘 편히 있을 곳이 없었고 그저 자연과 문학이 고모에게 위안이었다.
고모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곧장 서울로 올라와 9급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학창 시절 우등생이었던 고모는 너무나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고모와 같은 해에 태어난 작은할아버지가 대학에 진학하지 않아 덩달아 가지 못했다. 당시 좁은 시골 마을에서, 시동생은 대학 안 보내며 지집 딸만 대학 보낸다 동네사람들에게 욕을 먹을까 봐, 그렇게 고모는 학업의 꽃을 채 피우지 못한 채 생업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서울 친척 집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월급을 아끼고 아껴 시골에 돈을 보내고,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다. 덕분에 우리 아빠는 궂은일 한번 안 하고 대학을 졸업했다.
엄마가 아프고, 할머니가 다시 순천으로 내려가기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할머니에게 다시 순천으로 내려가라는 건, 사실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 할머니는 분당으로 올라올 때, 이곳에서 뼈가 되어 돌아가겠다 다짐했고 오랜 시간 분당에 살며 할머니는 꽤나 ‘분당 할매’가 되었다.
할머니의 모든 삶과 관계는 이곳에 있었다.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은 젊은 사람에게도 상당히 큰 변화이고 도전인데, 여든이 넘은 우리 할머니는 그 변화를 이겨낼 여력이 없었다.
할머니는 하나뿐인 딸년이 자기 속도 모르고 남의 편만 든다며, 자신의 신세에 대한 모든 서러움을 고모에게 오롯이 분노로 쏟아냈다. 고모는 항상 할머니가 듣기 싫은 말만 했다. 할머니와 우리와 함께 살며 집안일에 대한 힘듦을 토로할 때도, 며느리에 대한 불만을 얘기할 때도. 고모는 할머니에게 할 수 있는데 까지 최대한 아들 내외를 도우라 말했다. 직장에서 힘들게 일하다 돌아온 며느리의 고충을, 직장생활을 해 본 고모는 알았기에, 그리고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게 자신의 책무라 생각했기에. 고모는 끊임없이 중재했다.
아버지와의 약속 때문일까. 아니면 애초에 태어나길 그렇게 난 걸까.
그 작은 몸이 감당하기엔 너무 큰 책임감이 고모의 삶을 장악했다. 착한 딸, 착한 누나로 살아야 한다는 그 압박은 고모를 힘들게 했고, 환갑이 훌쩍 넘어 나이 든 딸이 된 이후에도 고모는 그 족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