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을 소 (昭), 어질 현 (賢)
그다지 세련된 이름은 아니지만, 난 내 인생이 이름 덕을 많이 본다 생각한다.
아직 얼굴도 불분명한 신생아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건, 아이의 지금을 지명하며 나중을 축복하는 것일까? ‘명명’ 행위가 땅 위 피조물 중 인간만의 일이라면, 그 고유함을 내게 준 사람이 나의 고모다.
내 가장 오래된 기억으로 거슬러 가보자.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미성아파트, 나의 첫 번째 집, 그곳에도 고모가 있다. 우리 집은 육층 고모네는 사층. 나는 네 살이 되어 어린이집에 다니게 됐고, 엄마는 출근길 아침에 나와 언니를 고모집에 데려다줬다. 유독 아침잠이 많은 나는 잠결에 음식을 잘 넘기지 못했다. 미역국에 밥을 말고, 김에 밥을 싸서 입에 넣어주는 건 고모의 몫이었다. (우리나라 육아의 팔할은 ‘김’이 한다는 건 웃지 못할 사실이다)
그렇게 아침을 먹고 나선 고모가, 가끔씩 고모부가 언니와 날 어린이집에 데려다주었다. 어린이집 끝나고는 당시 여덜살이었던 고모의 딸, 인애 언니가 우릴 데리러 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기가 아기를 돌본 격이다. 인애 언니는 혼자 마을버스 타고 초등학교를 다녔다. 고모에게 오십 원짜리 동전을 받아 나가던 인애 언니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고모는 종종 “인애는 혼자 버스도 타는데, 너희도 연습해서 어린이집 혼자 걸어 다녀야지”라고 말했다.
정말이지 우린 강하게 컸다.
고모집에 가면 꼭 거쳐야 하는 게 있었다.
고모는 나를 보곤 “아우, 너무 귀여워서 깨물고 싶네” 라며, 진짜로, 나의 짧고 오동통한 팔을 앙! 깨물었다. 난 그것을 일종의 통과의례로 여겼고, 감내했다. 사실 팔에 난 치아 자국, 그 과격한 애정표현이 꽤 마음에 들었다. 고모가 날 예뻐한다는 걸, 난 알 수 있었다.
나의 가장 처음엔 고모가 항상 함께 했다.
첫 생일잔치. 나의 돌잔치는 IMF 외환위기와 함께 실속 있게 치러졌다.
엄마의 첫째 딸, 우리 언니의 돌잔치는 근방의 가장 비싼 뷔페에서 가족 지인 다 모여 식사를 하고, 비싼 돌사진 촬영을 진행했다. 다만 필름 사진 시절, 어두운 실내에서의 돌사진은 가격에 비해 좋은 결과를 남기지 못했다.
그렇게 엄마는 두 번째 돌잔치, 둘째 딸의 돌상은 직접 본인이 차리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사진 기사는 당시 갓 사진 동호회에 들어간 나의 고모, 박윤남 씨가 맡게 됐다. 그렇게 엄마의 정성이 담긴 ‘셀프 돌상’과 고모가 찍어준 자연스러운 ‘셀프 촬영’으로 앨범 하나 가득 사진이 남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난 그때 공원에서 사진을 찍던 몇몇 순간을 기억한다.
첫 졸업식. 유치원 졸업식은 지금껏 내가 거친 여러 졸업식 중에 단연코 가장 슬펐다. 여섯 살, 일곱 살. 나를 이 년 동안 가르쳐 주신 안진봉 선생님과의 이별은 정말 슬펐고, 난 눈이 팅팅 붓도록 눈물을 쏟아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안녕은 진짜 안녕이었으니. 지금처럼 서로 번호를 교환하고 쉽게 안부를 물으며, 궁금 치 않아도 카톡 프로필을 통해 안부를 알게 되는. 그런 시절이 아니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고모는 슬퍼하는 내게 갈비를 사줬다. 직장에 나간 엄마가 함께하지 못할 때면 고모는 그 빈자리를 대신했다.
첫 반스(VANS) 운동화. 최근 반스에 체크무늬 운동화가 다시 보이던데, 난 그 체크 패턴의 반스 운동화를 무려 십육 년 전에 신고 다녔다! 고모는 백화점 구경하다 이뻐서 샀다며 빨강, 아이보리 체크무늬의 운동화를 우리 집 바닥에 툭, 던졌다. 난 빨강, 아이보리의 체크무늬와, 스웨이드 재질의 벨크로가 마음에 들었다. 지금도 그 운동화는 내 마음속 가장 예쁜 운동화다. 고모는 항상 옷, 신발, 가방 등을 사줬고, 어린 시절 우리 집에 비싸고 예쁜 건 대게 고모의 안목이었다.
고모는 내 가장 오래된 기억부터 함께였고, 우리 아빠의 누나, 엄마의 시누이, 할머니의 큰딸이었다.
할머니는 자주 말했다. 네 고모는 장남과 같다고.
할아버지는 간암 판정을 받고 제대로 된 치료도 시도하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당시 아빠는 군대에 있었고,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임종부터 장례, 이후의 모든 과정 중심엔 고모가 있었다. 고모는 숨을 거두기 직전의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약속했다.
“아버지, 제가 엄마랑 동생들 책임지고 챙길테니 걱정마시고 편안히 가세요.”
할아버지는 큰딸의 말에 편히 눈을 감으셨고, 고모의 마음엔 족쇄가 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