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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현이 Mar 14. 2022

까지와 가지

할머니가 왜 작은아들 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는 하나로 딱 정해질 수 없겠다. 각자의 입장과 증언이 다르다만, 한가지 공통 진술은 할머니는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계기로 인해 작은아들 집에 살게 됐다는 거다. 


그에 대한 나의 기억은 다르다. 할머니는 원래부터가 우리와 같이 사는 사람이었다!

모내기가 끝나면 순천에서 올라와 우리와 함께 몇 개월씩 살다 내려가시곤 했기에, 내 기억 속 할머니는 어느 순간부터가 아닌 원래 우리 집에 익숙하게 있던 사람이었다. 


 할머니와 함께 살기로 한 이후, 나의 엄마는 신림동의 방 두개짜리 복도식 아파트에서 분당 방 세개짜리 아파트로 이사를 결심한다. 대출과 예적금 언니와 내 세뱃돈 통장까지 끌어모아. 그렇게 공급면적 스물여덜평 아파트에 다섯명이, 삼대가 함께 살게 됐다!


 한 집에 삼대가 같이 사는 것은 한 공간에 여러 시간의 축이 교차함을 뜻한다. 누구의 과거가 나의 미래이며 나의 현재는 곧 어떤이의  과거가 된다.


 한 공간에 오고가는 언어도 다르다. 할머니는 완전히 전라남도식 사투리를 구사했다. 엄마 아빠는 두분다 전라남도 출생이지만 스무살부터 서울살이를 했기에 전라도의 흔적이 거의 남지 않은듯 남은 서울말을 구사했다. 언니와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기에 서울말에 할머니의 말씨가 어물정 가미된 그런 언어를 갖게 됐다. 



 하루는 할머니가 감자를 삶았다며 나와서 먹으란다. 

파근파근 뜨거운 감자에 설탕을 찍어먹는 상상을 하며 신나서 나갔는데. 


감자가 아니라 고구마가 덜렁 있었다. 

그걸보고 잔뜩 실망해 이건 감자가 아니라 고구마잖아! 라며 짜장(짜증)을 잔뜩 냈다. 


순심은 고구마를 “감자”, 감자는 “하직감자”라 했다. 


또 순심은 가지를 “까지” 라고 했다. 

하루는 할머니의 “까지”에 화가 났다. 


“까지가 아니라 가지!! 가지라고!!” 라며 악을 빽 썼다. 

일곱살 난 어린애가 제 할미에게 그리 고함을 질러대다니. 

돌이켜보니 길 가던 사람이 봤으면 혀를 내두르고 기함을 할 일이다. 


왜 난 “까지”에 그렇게 화가 났을까. 

분당에 어울리지 않는 할머니의 말투가 마음에 안들었던걸까. 


어린 내가 보기에도 할머니는 분당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던걸까?. 할머니의 그 투박한 말과, 거친 손길이 부끄러웠던 걸까. 아니면 새침때기인 내게 그녀의 텁텁한 손길이 아주 딱 맞진 않았던 걸까. 박박 빗어 하나로 꽉 묶어주던 머리도 골뎅바지에 니트도. 난 좀 더 세련된걸 원했던 걸까. 


 어렸을 땐 할머니와 내 시간이 충돌할때면 소리도 빽빽 지르고 마구 말다툼을 했다. 할머니와 나는 일반적인 손녀와 할머니의 모습은 아니었다.


 서로 난 곳도 자란 곳도 다른 우리 사이 충돌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뚫을 수 없는 완고한 벽은 제 아무리 거슬려도 그저 있는 그대로 둬야 할 필요도 있었다. 


 하루는 엄마가 집안의 그릇을 싹 정리하고 새 식기를 구입했다. 그 그릇을 보더니. 할머니는. 어떻게 집안 어른의 그릇을 애들이 쓰는 그릇과 같은걸로 쓰냐며 아빠와 자신의 식기는 다른 걸로 구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당시 나의 가치관으론 절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엄마는 다시 백화점에 가 할머니와 아빠의 식기는 다른 색상과 문양이 그려진 걸로 각각 구입했다. 할머니는 엄마가 사온 그릇을 보더니 마음에 안든다며 자신의 것은 반품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엄마는 할머니를 모시고 백화점에 갔는데, 할머니 맘에 드는 밥그릇이 없었다. 책자에 있는 디자인을 겨우 찾아 그나마 마음에 드는 걸 골랐는데, 그건 해당 브랜드의 하위 브랜드 제품이었고, 시즌이 지난거라 따로 회사에 주문해 수령해야 한다 했다. 그렇게 수소문하고 오래 기다린 끝에 할머니의 밥그릇이 도착했다. 그러나 그 또한 할머니의 마음에 차지 않았고 결국 할머니는 어느날 다이소에서 자신의 밥그릇을 사왔다.


 이 일화만 본다면 깐깐한 시어머니와 사는 며느리의 고달픔이 한껏 느껴질테지만 정작 나의 엄마는 이거에 대해 큰 불만을 표출하지 않았다. 아마 엄마는 팔십 평생을 살아온 시어머니를 바꾸는 것보다 그냥 자신이 맞추는게 더 편하단 생각을 했을 테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난 물론 할머니의 그 뚫을 수 없는 완고함 마저 사랑했지만 때때론 거기에 요즘 스타일의 그림을 걸거나 작은 구멍을 뚫어주고 싶었다. 할머니가 시도하지 않던 음식을 사먹이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차별적인 말에는 바락바락 대들며 논쟁도 걸어보고. 그러다 또 어떤 부분에선 그냥 그래그래~ 하며 넘기고. 


 할머니는 이사를 한번 갈 때마다 눈에 띄게 연로해지셨다. 분당 내에서 이동 이었음에도 작은 변화가 노인의 몸엔 큰 부담 이었나보다. 새로운 공간에 익숙해지고, 관계를 형성하고 그 모든 과정에서 우울감이 쌓여갔다. 그러며 동시에 그 우울감은 불안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꿈자리가 사납다던가, 몸이 아프다던가. 하루는 목이 아프다며 동네 종합병원을 찾아갔는데, 역류성 식도염 증상이라며 약을 처방 받았다. 그랬는데도 불안함은 사라지지 않았고 아빠는 할머니를 모시고 분당서울대병원에서 대대적인 검진을 했다. 다행히 아무 이상이 없었지만 노인의 몸이 느끼는 연로의 신호들, 그로 인한 불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절대 꾀병이라 생각해선 안된다. 신생아가 이유 없이 울때 그 몸의 성장을 생각해보자. 그 작은 몸이 삶에서 가장 급격한 속도로 자라기에 얼마나 근질근질 이유도 모른채 욱신거릴까. 어린이가 다리가 아프다는 말이 엄살이 아니라 실제 “성장통”이라는게 있듯. 노인의 몸은 지금의 내 몸은 차마 인식할 수 없는 그런 징조들, 낡아지고 병들어가며 찾아오는 통증이 분명 실제 할 거다. 


 할머니는 말했다. 오잇쌍자(오이 상자)를 하도 이고 지고 해서 손목 힘줄이 다 늘어나 못쓰게 됐다고. 그러며 손목의 통증을 자주 호소했다. 그날도 할머니는 손목이 아프다 했고, 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할머니! 빨리 옷입어. 병원가자. 내 친구 아빠가 하시는 판교에 재활의학과. 그 선생님 완전 잘 봐주셔. 거기 가보자. ”


절대로 집 앞 병원에 가면 안된다. 택시 정도는 타줘야 한다. 

옷을 챙겨입고 신나게 병원으로 향했다. 우린 세상에서 제일가는 명의에게 진찰을 보러가는 중이다. 


 재활의학과 선생님은 내 친구의 아버지이자, 예전에 교회 주일학교 봉사를 같이 했던 내가 참 좋아하는 어른이다.  당시 선생님은 모친상을 지낸지 얼마 안되었다. 장례식에서 뵌 이후 처음 만난 선생님은 이전보다 수척해진 안색이었다. 할머니의 증상 설명을 들으며 진찰을 하시더니 내게 할머니가 정정해서 참 좋겠단 말씀을 했다. 그러며 손수 충격파 치료를 해주셨다. 나중에 수납할 때 보니 치료비용이 제외 돼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에 앉아 할머니를 보았다. 할머니의 마음은 조금 나아졌을까. 


 “까지가 아니고 가지라고!!!!”

얼굴이 벌개지도록 악을 써대던 어린이는. 아들보다 딸이 좋다며 할머니를 설득하던 그 꼬마는. 때로는 악을 쓰기도 짜증을 내기도 좀 더 커선 어린아이 응석 받아주듯  달래주며 그렇게 순심을 대했다. 할머니와 함께 산 이십여년. 대부분의 날은 철부지 어린애처럼 할머니 성질을 돋궜지만, 아주 가끔 할머니의 마음에 합한 행동을 했다는게, 그때의 순심에게보다 지금의 내게 더 큰 위로가 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위하며 자신을 위했고 섞일 수 없는 다름 속에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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