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에겐 낳다 죽은 자식, 아기 때 죽은 자식, 다 커서 죽은 자식을 제외하고 세 명의 자식이 남았다.
고모, 큰아빠, 아빠. 윤남, 영기, 충기.
고모가 여러번의 유산 끝에 첫 아기를 품에 안았을 때, 할머니는 서울로 올라와 일하는 딸이 낳은 첫 손주를 손수 돌봤다. 고모는 후에 할머니와 같이 산 그 시간을 회상하며 너무 힘들었다 했다.
우리 할머니는 결코 함께 살기 쉬운 분은 아니었다. 할머니와 함께 사는게 너무 힘들었던 고모는 결국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의 삶을 택했으며, 할머니는 큰아빠와 함께 살며 그의 자식들을 돌보게 됐다.
각팍한 서울살이에 잘 적응하지 못한 큰아빠는 어린 자녀들과 노모와 함께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할머니는 젊은시절 땀흘려 일군 땅에 농사를 지었다.
한해 농사를 마치고 겨울이 되면 할머니는 서울 작은 아들집,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미성아파트로 올라와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해, 할머니는 엄마에게 함께 사는 것이 어떻냐며 물어왔다. 엄마는 그 물음에 바로 답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당신의 작은아들네, 곧 우리와 함께 살게 됐다.
엄마 아빠는 할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방 세개 짜리 집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서울에서 먼저 성남시 분당구에 터를 잡은 고모의 강력한 권유로 우린 분당으로 이사를 하게 됐다.
할머니의 본격적인 신도시 살이가 시작됐다.
할머니는 왜 고향 땅을 떠나, 그리도 사랑하는 큰아들을 떠나 도시에서 살게 되었을까?
그에 답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할머니가 작은아들과 함께 살게 된 가장 대외적이고 공식적인 명분은 맞벌이를 하는 작은 아들 내외의 두 딸을 돌봐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사실 큰아들의 사정도 녹록하진 않았다. 서울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순천으로 내려가 한번도 해보지 않은 서툰 밭일을 이제 막 시작한 큰아빠에게 할머니의 도움은 더욱 필요했다. 그리고 큰아빠의 세 아이들 또한 한창 손이 많이 갈 어린 나이였다.
큰아빠는 할머니를 붙잡았다. 엄마 없이 내가 어떻게 사냐며 가지말라 매달렸다. 하지만 할머니는 자신을 붙드는 그 큰아들과 그의 어린 손주 셋을 떠났다.
작은아들과 사는 것엔 합당한 명분이 필요했다.
할머니는 집안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많은 일을 했다. 시간이 흘러 언니와 나는 성인이 되었고 할머니의 도움이 필요치 않았다. 할머니는 노쇄했고 엄마는 할머니를 대신해 청소를 해줄 가사도우미를 고용했다.
할머니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녀는 이것을 자신이 이 집에 같이 살 명분이 점차 흐려지고 효용가치가 다해간다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였다. 자신의 역할을 빼앗겼다 느낀 할머니는 우울증이 왔다.
아빠는 화를 냈다. 큰아들 집이었음 그냥 당당히 살거면서, 여기선 식모처럼 살려 하느냐며 화냈다.
자신이 작은 아들이라 그런거냐며 묻는 아빠의 눈엔 눈물과 서운함, 그리고 엄마를 향해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 아이가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