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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현이 Apr 16. 2022

할머니와 아들과 목욕탕


 내가 아주 어릴 때  할머니는 내게 집에 아들은 하나 있어야 한다며,  엄마에게 남동생 한명 낳아달라 말하라 시켰다.  난 완강히 거절했다. 정말로 동생이 생기는게 싫었다. 온 친척을 통틀어 집안의 막내가 얼마나 꿀 같은 자리인데 그걸 뺏길 순 없었다.


 우리집에 아들이 필요하단 할머니의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딸은 출가 외인이라 나중에 명절에 엄마 아빠가 외롭다 했다. 난 그게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짜피 난 아빠랑 결혼할거니까. 두번째론 목욕탕에서 아빠 등을 밀어줄 사람이 필요하단 거다. 늘 목욕탕에 같이 가도 혼자 들어갔다 먼저 쓱 나와 한참을 기다리고 앉아있는게 얼마나 짠하냐며. 

 아들이 필요한 이유가 목욕탕 가기라니!

어린 내가 보기에 남동생은 정말 아무 쓸모도 없었다. 그도 그럴게 할머니는 딸 하나 아들 둘이 있지만, 정작 할머니를 가장 챙기고 효도하는 자식은 딸, 윤남이었다. 윤남의 남동생들은 그저 동생들일 뿐이었다!


 내가 여섯살이 되었을때 난 당차게 외쳤다. 


“할머니! 아들 낳으면 기차타고 딸 있으면 비행기 타는 거야!”


할머니는 그 말을 퍽 좋아했다. 깔깔 웃으며  “그래, 니 말이 맞다. 네가 개보다 낫다.” 라며 똘똘한 막내손녀를 칭찬했다. (“개보다 낫다.”는 할머니가 건네는 최고의 찬사다.)


그 이후로 할머니는 남동생 얘기를 꺼내지 않으셨고, 다행히 우리 엄마는 셋째를 낳기엔 나이가 있었기에 난 우리집 막내 자릴 지킬 수 있었다. 이제 와 하는 얘기지만 난 고등학생때 까지도 ‘동생이 생기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을 했고, 부모님 두분이 여행을 가실때면 동생이 생기지 않게 해달라 기도했다.


 할머니의 아들 사랑은 지독했다. 엄밀히 말하면 ‘큰아들’ 에 대한 사랑이었는데, 고모는 이를 ‘집착’이라 했다. 할머니의 세 자녀중 오직 큰아빠 만이 고향땅을 지키며 순천에서 삶을 일궜다. 우리 아빠와 고모는 일찍이 서울로 올라와 도시에 자릴 잡았다. 아빠와 고모는 어린 시절을 지우고 싶은 과거라 회상한다. 자신은 고향이 싫다 말하는 그들에겐 온전히 아물지 못한 어린 시절의 상처가 보였다. 


 할머니는 노골적으로 큰아들을 편애했다. 할아버지 또한 집안의 장손이 기가 죽으면 안된다며 큰아빠를 결코 야단치지 않았다. 할아버지 자신이 워낙 온순한 성격이라, 큰아들 만큼은 털털하고 소위 남성적인 모습으로 자라길 바라셨다고 한다. 그렇게 큰아빠는 자유분방하게 자랐고, 섬세한 감성의 고모와 큰아빠는  잘 맞지 않았다. 


 작은 시골집에서 함께 자라며 고모와 큰아빠 또한 흔한 남매의 갈등을 겪었을테다. 사실 그 갈등이란 털털한 큰아빠의 일방적인 괴롭힘 이었다. 고모에 의하면 할머니는 누가봐도 큰아빠가 잘못한 상황에도, 단 한순간도 고모의 편이 돼주지 않았다. 누나란 년이 동생을 감싸주질 못한다며 모질게 혼을 낼 뿐이었다. 



“엄마는 왜 날 미워했을까?”


늙은 딸이 된 고모의 그 질문엔 차마 다 담길 수 없는 깊은 세월이 베여 있었다. 환갑이 넘은 딸이 이십대의 어린 엄마를 회상했다.


 스무살에 가난한 삼대 독자에게 시집 간 할머니는 그야말로 지독한 시집살이 겪었다. 남편은 결혼한 이듬해 군대에 갔고 홀로 시조부모, 시부모, 그리고 어린 시누이가 있는 집에 남아 모진 세월을 견뎠다. 농사와 집안일, 일년에 열번도 더 드리는 집안 제사를 차치하고 할머니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다름아닌 배고픔 이었다. 

 할머니는 마을에 꽤나 부잣집에서 태어나 배는 안 굶고 자랐다고 한다. 할머니의 언니들은 다 부잣집에 시집을 갔는데, 그 돈많은 집 아들들은 다 놈팽이 같이 살며 술과 여자, 도박을 일삼았다. 시집 간 언니들은 매번 울며 친정에 찾아와 쌀이며 옷가지며 이런 저런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걸 보고 할머니는 다짐했다. 자기는 절대로, 시집을 가면 친정에 손을 안벌리겠노라. 그리고 할머니의 아버지는 다짐했다. 순심이는 돈 없어도 인품이 좋은 남성에게 시집을 보내노라고. 그렇게 할머니는 논 한마지기 없는 극단적으로 가난한 양반 집안의, 무려 삼대 독자에게 시집을 가게 됐다. 

 우리 할아버지는 당시 농촌 남자들이 흔히 하던 술, 담배, 마작엔 일절 손도 안대는 정말 성실하고 참한 남성이셨다 한다. 밭일 보다는 서예에 더 능했던 남편은 돈 버는데엔 영 재주가 없었나 보다. 집엔 항상 먹을게 부족했다. 할머니는 밥을 짓고 시어른들 밥을 먼저 푼 다음 남은걸 어린 시누이와 나눠 먹어야 했다. 그 어린 시누이는 먹성이 좋았고, 할머니가 밥상을 차리고 돌아오면 이미 남은 밥은 한톨도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가마솥에 눌러 붙은 누룽지를 벅벅 긁어 먹었고 그걸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보곤 할머니가 식탐이 많다며 그리 구박했다. 주린 배를 쥐어잡고 냇가에 나가 빨래를 하다 보면 문득 양잿물을 먹고 확 죽어버리고 싶단 충동이 들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여든이 넘어서도 ‘밥’을 건장한 젊은이 보다도 많이 드셨다. 그렇게 밥을 좋아하는 사람이 쌀을 맘껏 못 먹고 살았으니.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 배고픔이 난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할머니의 첫 아이는 아들 이었고, 낳던 중 죽었다. 그리고 나서 할머니는 나의 고모를 낳았다. 할머니가 딸을 낳자 시집살이는 더욱 거세졌다. 시어머니의 구박은 날로 심해졌고, 할머니는 항상 자살 충동을 느꼈다. 그러다 할머니가 첫 아들, 내 큰아빠를 낳자 그제야 좀 사람 대접을 해줬다고 한다. 박씨의 대를 이어갈 장손을 낳자 집안 구성원으로서 자격을 갖게 된 걸까? 그렇게 큰아빠는 그 지독한 시댁에서 할머니를 견디게한 한줄기 빛이 됐다.


 고모는 말햇다. 할머니에게 딸은 자신을 더 힘들게 만드는 존재였음을. 

나이 든 딸은 자신에 사랑과 미움이란 엄마의 양가적 감정을 이해했다. 

그러나 ‘이해하다’가 곧 ‘괜찮다’가 될 순 없다. 

 할머니의 아들 사랑은 지독했다. 엄밀히 말하면 ‘큰아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고모는 이를 ‘집착’이라 했다. 할머니의 세 자녀 중 오직 큰아빠 만이 고향땅을 지키며 순천에서 삶을 일궜다. 우리 아빠와 고모는 일찍이 서울로 올라와 도시에 자릴 잡았다. 아빠와 고모는 어린 시절을 지우고 싶은 과거라 말한다. 고향이 싫다 말하는 그들에겐 온전히 아물지 못한 어린 시절의 상처가 보인다. 


 할머니는 노골적으로 큰아들을 편애했다. 할아버지 또한 집안의 장손이 기가 죽으면 안 된다며 큰아빠를 결코 야단치지 않았다. 할아버지 자신이 워낙 온순한 성격이라, 큰아들만큼은 털털하고 소위 남성적인 모습으로 크길 바라셨다고 한다. 그렇게 큰아빠는 자유분방하게 자랐다. 

 작은 시골집에서 함께 자라며 고모와 큰아빠 또한 흔한 남매의 갈등을 겪었을 테다. 사실 그 갈등이란 큰아빠의 일방적인 괴롭힘이었다. 고모에 의하면 할머니는 누가 봐도 큰아빠가 잘못한 상황에도, 단 한순간도 고모의 편이 돼주지 않았다. 누나란 년이 동생을 감싸주질 못한다며 모질게 혼을 낼 뿐이었다. 


“엄마는 왜 날 미워했을까?”


늙은 딸이 된 고모의 그 질문엔 차마 다 담길 수 없는 깊은 세월이 베여 있었다. 환갑이 넘은 늙은 딸은 이십 대의 어린 엄마를 회상했다.


 스무 살에 가난한 삼대독자에게 시집간 할머니는 그야말로 지독한 시집살이를 겪었다. 남편은 결혼한 이듬해 군대에 갔고 홀로 시조부모, 시부모, 그리고 어린 시누이가 있는 집에 남아 모진 세월을 견뎠다. 농사와 집안일, 일 년에 열 번도 더 드리는 집안 제사를 차치하고 할머니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다름 아닌 배고픔이었다. 

 할머니는 마을에 꽤나 부잣집에서 태어나 배는 안 굶고 자랐다고 한다. 할머니의 언니들은 다 유복한 집안에 시집을 갔는데, 그 돈 많은 집 아들들은 다 놈팡이 같이 살며 술과 여자, 도박을 일삼았다. 시집간 언니들이 남편한테 맞고 울며 친정에 찾아와 쌀이며 옷가지며 이런저런 도움을 받는 걸 보고 할머니는 다짐했다. 자기는 절대로, 시집을 가면 친정에 손을 안 벌리겠노라. 그리고 할머니의 아버지는 다짐했다. 순심이는 가난해도 인품이 좋은 남자에게 시집을 보내노라고. 그렇게 할머니는 논 한 마지기 없는 극단적으로 가난한 집안의, 무려 삼대독자에게 시집을 가게 됐다. 

 우리 할아버지는 당시 농촌 남자들이 흔히 하던 술, 담배, 마작엔 일절 손도 안대는 정말 성실하고 참한 남성이셨다. 그러나 밭일보다는 서예에 능했던 남편은 돈 버는 데엔 영 재주가 없었고 집엔 항상 먹을게 부족했다. 할머니는 밥을 짓고 시어른들 밥을 먼저 푼 다음 남은걸 어린 시누이와 나눠 먹었다. 그 어린 시누이는 먹성이 좋았고, 할머니가 밥상을 차리고 돌아오면 이미 남은 밥은 한 톨도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가마솥에 눌어붙은 누룽지를 벅벅 긁어먹었다. 그걸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보곤 "쟤는 식탐이 많다며" 구박했다. 할머니는 주린 배를 쥐어 잡고 냇가에 나가 빨래를 했고 문득 양잿물을 먹고 확 죽어버리고 싶단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할머니는 여든이 넘어서도 ‘밥’을 건장한 젊은이 보다도 많이 먹었다. 그리 밥을 좋아하는 사람이 쌀을 못 먹고살았으니.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 배고픔이 난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할머니의 첫 아이는 아들이었고, 낳던 중 죽었다. 그러고 나서 할머니는 나의 고모를 낳았다. 할머니가 딸을 낳자 시집살이는 더욱 거세졌다. 시어머니의 구박은 날로 심해졌고, 할머니는 종종 자살 충동을 느꼈다. 그러다 할머니가 첫아들, 나의 큰아빠를 낳자 그제야 좀 사람대접을 해줬다고 한다. 

박 씨의 대를 이어갈 장손을 낳자 집안 구성원으로서 자격을 갖게 된 걸까? 

여하튼 큰아빠는 그 지독한 시댁에서 할머니를 견디게한 한줄기 빛이 됐다.


 고모는 말했다. 할머니에게 딸은 자신을 더 힘들게 만드는 존재였음을. 

나이 든 딸은 자신에 대한 사랑과 미움이란 젊은 엄마의 양가적 감정을 이해했다. 

그러나 '이해하다'와 '괜찮다'는 동의어가 될 수 없었다. 

이해가 곧 세월에 대한 위로가 될 순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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