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19코스는 화진해변에서 강구항으로 이어지는 해안 중심의 길이다. 바닷가의 작은 항을 따라 옹기종기 퍼져있는 마을들은 조용하기 그지없지만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걷는 길이 없는 곳에서는 차들이 다니는 도로변을 걸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영덕블루로드의 D코스를 따라가며 해파랑길로 이용하는 구간이다.
사라지는 것들과 잊혀지는 추억들(화진해변-지경천하구-부경항)
해파랑길 19코스를 시작하는 화진해변에 서면 몇 년 전 생긴 커피전문점 건물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조용한 바다 경치를 즐기면서,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원하는 이들이 이곳을 찾는다. 나는 이곳보다는 바로 옆에 있는 화진휴게소로 가서 바다가 보이는 식당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화진휴게소는 푸른 바다와 함께 화진해수욕장의 경관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아쉬운 건 이 휴게소가 수익성이 떨어지자 허물어 내고 이 자리에 리조트를 짓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경제논리를 따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는 하나 사라진 장소에 대한 기억을 지니고 있는 이들은 과거를 떠올리며 아쉬워하게 된다. 같은 길을 두 번 이상 걸어본 이들은 자신이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상태를 계속 비교하며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곤 한다. 사람이나 길, 또 길에서 만나는 많은 것들이 시간의 영향을 받아 변하게 된다. 변하는 것들을 어찌 막을까.
지금은 철거된 화진휴게소의 식당 전경. 창가에서 식사를 하며 보는 바다의 전경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도로를 따라가다 지경리 길가에 있는 바다마루펜션을 지나치면 바닷가에 나있는 길을 따라가게 된다. 이곳에 바다 쪽으로 향한 바위가 있는데 어떤 이는 이 바위를 보며 바다로 들어가는 동물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는데 나는 한 마리 맹수가 입을 크게 벌리고 포효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사람마다 다르게 보이는 것은 그동안의 경험과 사물에 대한 인식의 차이 등 다양한 요인이 원인이 될 수 있다. 그게 당연한 것이다. 이름 없는 바위처럼 우리가 정의 내리지 않은 것들은 그 해석이 사람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 가끔은 이름이 없는 무명씨의 무덤을 만날 때 무덤의 주인공이 지니고 있을 수많은 사연을 상상하게 되는 것처럼.
바닷가를 향해 걸어가는 맹수가 포효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바위
포항과 영덕의 경계에 있는 지경천 하구의 물이 줄어든 틈을 이용해 지경천을 건넌다. 지경천은 하천 바닥의 토심이 깊지 않고 수량의 변동폭이 커서 홍수나 태풍이 지나가면 하천의 바닥이 쉬 드러나고, 상류로부터 떠내려온 돌들이 많이 쌓이는 하천이다. 그래서 길을 돌아가기 싫어 하구를 가로질러 갈 때는 하천의 변화를 잘 살펴봐야 한다. 조금이라도 위험하다면 돌아가는 것이 좋다. 약간 시간이 더 걸리는 것이 안전하지 않은 길을 가는 것보다 몇 배 나은 선택이다. 지경천을 건너면서부터는 영덕블루로드를 따라 걷게 된다. 해파랑길 19코스에서 22코스가 영덕블루로드 A에서 D코스와 같다.
하천의 물길인 하도의 변화가 심한 지경천하구를 가로질러 건넌다.
영덕대게공원에서 축산항까지 이어지는 64.6km의 영덕 블루로드. A에서 D까지 네 개의 코스가 있다.
부경항이 있는 부경리는 마을의 뒷골목을 따라 해파랑길이 이어진다. 골목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고, 동해자전거도로표시를 해놓아 특별히 안내판이 없어도 편안한 길을 갈등 없이 따라갈 수 있다. 이제 시골의 길을 가도 좁은 골목의 흙길을 걷거나 아이들의 뛰어노는 목소리를 듣기 어렵다. 나라의 살림은 커졌는데, 결혼을 앞둔 이들이나 젊은 부부들은 아이를 낳는 것을 꺼려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 변화를 더 크게 느끼게 되는 것이 시골의 작은 마을이다. 하긴 시골이라는 말을 쓰는 것도 조심스럽다. 그냥 지방이라는 단어를 선택할 때가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시골의 골목을 걸어가며 사람 살아가는 털털하고 구수한 맛을 느끼는 일은 이제 기억의 저편에나 있는 것이다. 골목길 한 구석에 사용하지 않는 우물이 다소곳이 뚜껑을 덮고 있다. 혼자 걷는 해파랑길은 과거의 기억을 회상해 보는 좋은 계기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사라지거나 변한 곳에서는 과거를 찾는 일이 쉽지 않다.
골목에서 만난 우물(좌), 깨끗하게 잘 정비된 골목이지만 사람을 만나지 못한 골목길에서 아이들의 노는 소리를 떠올려 본다(우)
곰솔 가지 끝에 바람이 불 때(부경항-장사 해변-장사천-원척리)
부경항을 지나 장사해변으로 간다. 해안에 닻을 내리고 있는 배는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에 교란을 주기 위한 양동작전으로 학도병 772명과 지원인력을 태우고 장사항에 상륙했던 문산호이다. 작전 당시 배는 침몰하였는데 이를 복제해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 상륙작전으로 학도병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수십 명이 행방불명되었다. 장사일대에서 북한군의 보급로를 끊고, 목숨을 바쳐 조국을 구했던 그들의 이야기를 2019년 곽경택, 김태훈 감독이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이라는 영화로 재탄생시켰다. 아직 철도 덜 들었을 꽃다운 아이들이 희생된 장사해변은 지나칠 때마다 가슴이 시린 곳이다. 해변의 곰솔 한그루 한그루가 772명의 학도병이라 생각을 해본다. 그들은 나무의 영혼이 되어 지금도 조국의 영토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솔가지를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의 소리가 학도병들의 두런거리는 이야기 소리처럼 들린다.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의 모습. 앞에 있는 식물은 외래식물인 큰김의털과 소리쟁이이다.
장사상륙작전 안내비와 해변의 곰솔숲
장사해변도 주변의 다른 해변들처럼 정월 보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제사를 지내고 방생을 하는 곳이다. 파도를 타는 여러 명이 바닷속에 들어가 파도를 기다리고 있다. "춥지 않나?" 보는 내가 더 추운 듯하다. 저들은 해보지도 않고 추위 걱정만 하는 나를 더 불쌍하게 볼지도 모르겠다. 다시 다리로 돌아가지 않고 장사천 하구를 걸어 건넌다. 장사천하구는 사구에 의해 수시로 하구가 막히지만 하구로 내려온 물이 사구를 허물고 스스로 물을 소통시키는 열린 하구이다. 장사천하구 옆에 사는 부흥리 사람들은 하구와 바다가 모두 마을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인지 하구 옆에 서낭당인 사신당을 지어 놓았다. 사신당 옆의 바위에 황금거북이와 거북이를 설치해 놓았는데 이게 사신당을 위한 조각물인지 관광을 위한 것인지 경계가 애매하다. 사신당을 지나 바닷길과 도로 갓길을 따라 걷다 보면 원척리를 알리는 표지석과 만난다. 해파랑길의 여러 구간들이 매해 급격하게 바뀐다. 새로운 탐방로를 조성하거나, 태풍 같은 자연재해로 인해 잘 조성된 길이 사라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길 가는 것을 주저할 필요는 없다. 길은 언제든 다시 복구된다. 새로 조성된 길은 길을 만드느라 들어간 세금을 생각해서라도 즐기며 걸어야 한다.
장사해변의 풍경, 멀리 파도를 타는 이들이 보인다
장사천하구 부흥리의 서낭당
어둠이 내리는 길에서(원척리-구계항-남호 해변-삼사해상공원-오포3리-강구교)
원척리는 '바다와 산을 자로 잰 듯 조화롭게 한 마을'이라 그런지 깔끔한 집들이 여럿 보인다. 최근엔 펜션들이 늘어나 마을의 경관을 바꾸고 있다. 콘크리트 옹벽 옆에 곰솔을 끼고 있는 동신당을 지나 도로 옆에 설치한 데크를 따라 걷는다. 불쑥 이야기 안내판이 길가에 세워져 있는데 천하잡보라 불린 방학중에 대한 설명이 있다. 방학중은 영덕읍 하저리에서 태어난 해학과 풍자의 달인이라고 소문난 인물이다. 전국을 떠돌며 해학적인 이야기를 하였으며, 재주와 익살이 넘쳤다고 한다. 그에 대한 이야기 중에는 속임수를 쓰거나 심술을 부리는 이야기도 있어 잡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단다. 그중 한 가지, 방학중은 그의 조상 제삿날에 옆집 황소를 끌고 묘소로 가서 소 위에 젓가락을 얹어 놓고 " 아이고 조상님. 오늘은 황소 한 마리를 통째로 올리니 많이 잡수십시오"라고 했단다. 김선달이나 방학중이나 비슷한 사람이었나 보다. 어쨌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웃음으로 받아들일 정도라면 그때는 마음에 여유가 있고, 건전한 사회 아니었을까.
구계항으로 가는 원척리의 한적한 바닷가를 내려다보며 잠시 쉰다. 조금씩 오후의 빛이 퇴색되고 바닷가의 곰솔들이 구부정하게 어깨를 움츠리면 혼자 걷는 게 외로워진다. "내가 왜 혼자서 이러고 있을까?"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함께 가겠다는 사람이 없다. 다들 열심히 일해야 하는 평일에 누가 돈을 쓰며 길을 걸을까. 몇몇 같이 걷고 싶은 이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만큼 나는 적극적이지 않다. 길을 가기 위해 시간을 조정하고 함께 움직이는 일들이, 가고 싶을 때 훌쩍 떠나는 나의 습관에도 맞지 않다. 이런저런 이유로 혼자 걷는 길이니 외로워도 참아 넘겨야 한다. 영 기분이 안 풀리는 날에는 저녁을 먹을 때 막걸리 한 잔 마시고 푹 쉬면 좋아진다. 복잡하게 매달리는 것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쉽게 극복할 수 있다.
구계항을 지나 남호해변에 도착하니 멀리 삼사해상공원이 보인다. 저곳과 오포리를 지나 강구항을 보며 강구교에 도착하면 오늘의 일정이 끝나는데 아무래도 해가 질 것 같다. '조금 서둘러야겠다.' 남호리에는 새로운 숙소들이 속속 생기고 있으며 기존의 숙소들도 리모델링을 하고 상호를 바꾸고 있다. 사람이나 관광지의 숙소나 살아남기 위해서 끊임없이 개발하고 변화하는 건 비슷하다.
길을 따라가며 원척리 입구에 도착하다
잘 모르는 방학중이라는 인물을 안내판 덕분에 찾아본다.
원척리의 한적한 바닷가에서 고요하게 가라앉는 오후 시간을 잠시 멈추어 감상한다
아직 갈길이 멀다. 남정천 하구의 좁은 인도교를 건너 바닷길을 서둘러 간다. 한걸음에 삼사해상산책로 앞에 이른다. 바다로 향한 데크길인 산책로에서 여러 명이 바다를 감상하고 있다. 혼자 걸을 때, 특히 어둠이 내리는 시간의 보행습관은 직진이다. 주변에 어떤 시설이나 훌륭한 문화자원이 있어도 방향을 바꾸지 않고 통과한다. '느리게 걸으며 자연과 호흡하라고, 천천히 걸으면 안보이던 것들이 보인다'라고 항상 이야기해 왔지만 이럴 땐 나도 목적지만 바라본다. "안 그러면 길에서 날 샌다." 삼사해상공원 입구에서 해가 저물었다. 가로등 불빛 따라 천천히 걸어본다. 세 명의 시랑이 숨어 들어가 살았다는 삼시랑 계곡도 개발이 시작되었고 유명 관광지로 변한 삼사리는 이제 누가 은둔할만한 공간은 아니다. 오포리를 지나 네온사인이 찬란한 강구항을 따라 걷는다. 오늘도 강구교 너머 대게식당이 많은 거리에는 저녁을 먹으려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분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