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해파랑길, 거친 바다가 신을 찾게 한다

21코스 : 영덕 해맞이공원- 축산항. 12.8km

by 물냉이

해파랑길 21코스는 영덕 해맞이공원에서 축산항까지 바다를 따라가는 길이다. 마을을 들를 때마다 서낭당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느티나무, 팽나무, 향나무 같은 마을 주민과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온 나무들과도 마주할 수 있다. 해안을 따라 걷는 탐방로에서는 군인들이 사용하던 해안 초소며 시설들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이제는 걷기여행자들을 지켜주고 볼거리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는데, 물질을 하고 뭍으로 나온 해녀의 모습이나 초소를 지키며 손을 흔들어 주는 군인들의 모습을 한 조각상들을 만날 수 있다. 거칠게 몰아치는 파도를 따라가다 보면 멀리 목적지인 죽도산이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걷기여행자를 반겨준다.


서낭당에서 삶의 흔적을 읽는다(영덕 해맞이공원-대탄항-노물항-노물리)

영덕 해맞이공원의 입구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다. 어디에고 앉아서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마땅한 자리가 없다. 해변으로 빠지지 않고 해맞이 공원으로 가니 의자가 있다. 공원에 있는 '대게 품은 오뎅'집은 아쉽게도 인기척이 없다. 의자 한쪽에 앉아 차게 식어버린 김밥을 먹는다. 혼자 걷는 해파랑길에서 중간에 식사할 곳이 애매할 때에는 간편식을 준비한다. 군용식품을 비롯해 간단히 데워 먹을 수 있는 일회용 레토르트 식품들이 많이 있지만 그런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주로 김밥이나 만두, 컵라면, 빵, 육포, 에너지바 등을 이용하는데 그것도 싫을 때에는 사탕을 먹으면서 길을 걷는다. 겨울이라 음식물이 상할 염려가 없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아무래도 걸으면 등과 접하는 부분이 열이 오르기 때문이다. 어쨌든 길 위에서는 가볍게 먹고 저녁에 쉴 때 제대로 먹자는 생각을 기준으로 한다. 그렇게 자주 저녁을 많이 먹어서인지 해파랑길을 열심히 걸어도 뱃살은 잘 안 빠진다.

추운 겨울 영덕 해맞이공원엔 찾아오는 사람은 없고 빈 가게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길에서 바라본 대탄리, 멀리 축산항의 죽도산이 보인다

조금씩 내리는 비이지만 여러 시간을 걷는 걷기여행자에겐 꽤나 피곤한 길이다. 그동안 바람에 단련이 되어 요령이 생긴 것인지, 어제 강구항에서 산 우산이 좋은 것인지 바람에 우산이 뒤집히는 횟수는 훨씬 줄어들었다. 그래도 오늘 역시 바람이 만만치 않은 날이어서 대탄리까지는 도로를 따라 걷는다. 이번에도 이럴 경우 군시설과 약속 바위를 비롯한 영덕의 화강섬록암이 만들어 놓은 여러 종류의 바위를 보지 못하고 지나쳐야 하지만, 아쉬워도 감수해야 한다. 흙이 흘러내린 도로의 사면이 기상의 상태를 대신 이야기해준다. 대탄리에서 바다와 마주하니 거친 파도가 가라앉을 기색이 없다. 오늘은 내내 파도의 눈치를 보며 걸어야 할 것 같다.

대탄리까지의 도로를 따라가는 길과 도로의 사면이 무너져 내린 모습. 대탄리의 바다는 거칠게 밀려와 해안에 파도를 뿌려댄다

오보리의 마을 이름은 마을의 입구에 까마귀의 머리를 닮은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것이다. 마을 입구의 도로에 의해 끊어진 산자락이 그 바위인지 아니면 그 앞에 부서진 채 쌓여 있는 돌들 중 하나였는지 알 수 없다. 오보리의 서낭당은 느티나무가 둘러싸 숲을 이루고 있어 서낭당 뒤 경사면이 무너지는 것을 막고 있다. 오보리의 서낭당에는 2개의 신위가 있는데 '오보성황배씨신위(烏保城隍裵氏神位)'와 '오보기지유씨신위(烏保趾劉氏神位)' 라 쓰여 있다. 기지라는 단어가 건축물의 기초나 어떤 일의 근본을 뜻하는 것이므로 배씨와 유씨는 이 마을의 입향조일 것이다. 마을은 사는 사람이 없는 듯 조용한데 방파제를 넘어 밀려오는 파도가 마을 앞쪽 해변까지 다가오며 그르렁 거린다. 마을이 보이는 곳에서 한참을 서서 파도 구경을 하였다.

오보리의 서낭당과 서낭당 뒤 사면을 보호하고 있는 느티나무숲
오보리 방파제를 넘어 들어온 바닷물이 해안으로 거칠게 밀려온다. 멀리 오보리 입구의 도로에 잘린 산자락이 보인다

오보리에서 노물리로 넘어가는 도로에서 앞서가는 한 남자를 만났다. 반가움에 다가가 인사를 하니 자신은 부산에서부터 쉬지 않고 걸어오고 있다 했다. 처음 길을 걷는데 오늘은 다리가 아파 힘이 많이 든다고 하였다. 그에게 내가 알고 있는 저녁때 숙소에서 발의 피로를 푸는 방법을 설명해주고 노물리 입구에서 마을 안쪽에 있는 서낭당을 보기 위해 헤어졌다. 스틱에 의지해 절뚝이며 바닷가로 나가는 그가 무사히 길을 마칠 수 있기를 기도해 주었다. 노물리에는 바닷가의 아랫마을과 안쪽 골짜기에 있는 윗마을 두 곳에 서낭당이 있다. 안쪽의 서낭당은 세 줄기의 느티나무 아래에 자리 잡고 있으며, 마을의 터주인 안씨(基主安氏)와 마을을 지켜주는 박씨(洞防朴氏)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신위가 놓인 탁자에 깨끗한 한지가 깔려있고 사용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촛대와 북어포가 제기에 올려져 있는 모습을 보면 지금도 이곳을 지키는 손길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서낭당 지붕 기와 사이로 흙이 드러나고 문과 벽체가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것을 보면 관리비용이 넉넉하지는 않은 것 같다. 대들보에 쓰여 있는 날짜를 보니 을사년 12월 23일이다. 을사년이면 1965년이거나 1905년이다. 인근에 있는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니 그 내용은 모르고 서낭당은 노인정에 있는 할머니들이 관리하니 그분들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서낭당의 지금 상태가 이해가 갔다. 60대 중반이라는 주민은 서낭당이 과거엔 바다 쪽의 것보다 상태도 좋고 돈도 많이 들여 관리했었는데 지금은 지원을 받아 새로 지은 바다 쪽의 서낭당이 훨씬 좋다고 부러워한다. 그의 관심은 서낭당보다는 원전을 짓게 되면 받을 보상에만 관심이 있다. 원전을 짓게 되면 이 마을에서 살기 어려워질 수도 있지 않냐고 하니 그런 건 신경 안 쓴단다. 다만 보상을 받아 자식들이 도시로 나가 살 비용을 대줄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한단다.

바닷가에 있는 서낭당 주변은 노물리 경로당을 지으면서 깨끗하게 정리되었으며, 서낭당도 2019년 새로 지었다. 서낭당 안에는 마을의 입향조인 안씨와 박씨의 신위가 종이꽃 사이에 놓여 있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새로 지은 줄 알았는데 서낭당 앞에 있는 안내비에는 개인이 사재를 출현해 다시 지었다고 쓰여 있다. 서낭당 옆에 있는 느티나무가 서낭목이며, 그 옆에 함께 있는 향나무도 수형이 범상치가 않다. 느티나무는 뿌리에 돌을 품고 있어 마치 아이를 품고 있는 여성과 같은 모습이고, 향나무는 상부에서 여러 갈래로 가지를 뻗고 있다. 남아를 선호하는 바닷가에서 아이를 품고 있는 느티나무는 좋은 기도처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이곳을 찾는 이들이 꾸준히 있다. 향나무는 오랜 시간 주민들의 정성스러운 보살핌을 받고 있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다. 향나무는 태우면 진한 향을 내 제당 근처에 많이 심는다. 굳이 향목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나무 자체에서 향이나 벌레 등을 쫒거나 상징적인 의미로 심기도 한다. 동해안은 향나무가 자생하는 지역이어서 이곳의 향나무도 외부에서 가져온 것이 아닌 지역에 자생하는 향나무일 것이다.

오보리에서 노물리로 넘어가는 길에서 만난 걷기여행자. 바다는 지친 그에게도 오늘 밤에 꿀 같은 휴식을 나누어 줄 것이다
노물리 할배서낭당의 세월을 입고 있는 모습
노물리 할매서낭당의 신위와 단을 장식하고 있는 종이꽃들
할매서낭당 옆의 가지가 많은 향나무
서낭당 옆 돌을 품고 있는 느티나무. 옆에 함께 있던 느티나무는 속이 썩어 잘려 둥치만 남았다


작은 물구멍이 제방을 지킨다(노물리-오매항-경정 3리)

노물리에서부터 경정항까지의 해변길은 기암이 줄을 서고 과거 군인들이 경계근무를 서던 해안 초소에 해녀상이나 군인상 들이 있어 길이 즐거운 곳이다. 많은 이들이 이 구간을 해파랑길 중에서도 아름다운 길로 꼽길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바닷가 길이 아닌 도로를 따라 걷는다. 이제까지 걸어보지 않은 도로구간은 어떤지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노물리에서 경정항에 이르는 도로는 도로 가장자리에 동해안 자전거길 표시를 해놓아 걷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포장된 도로를 따라 산길을 올라가는 것은 힘도 들고 아름다운 경관도 없다. 삐질거리며 경사진 도로를 따라가다 금방 후회하고 말았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며, 바람이 거세어도 바닷길로 가는 건데 비도 그치고" 그렇다고 길을 돌아갈 수도 없다. 바다로 직접 내려가는 산사면을 살펴보다 금방 포기하고 말았다. '사고 나기 딱 좋은 벼랑이다' 석리마을에 와서야 마을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경관이 마음에 들었다. 바닷가의 절벽에 좁은 땅을 내고 그곳에 지은 집들은 집과 집을 이동하려면 손바닥만 한 남의 집 마당을 자연스럽게 지나야 했다. 마을 사람들끼리 안부는 묻지 않아도 다 알 것 같았다. 석리마을은 집과 집 사이에 이대가 많이 심겨 있다. 이대는 바람을 막아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방풍용 키 작은 나무로, 동해에서는 바닷가에 방풍림으로 조성한 이대숲을 쉽게 볼 수 있다. 석리마을에서 바닷가로 내려가다 길이 마을을 따라 빙 돌아가 다시 길 위로 올라왔다. 어쨌든 도로를 따라 간 길을 경정항까지는 가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은 경정항의 효심사 입구로 소나무숲을 따라 내려갔다. 경정항의 바위 위에 얹힌 듯 기대고 있는 오매향나무가 있는 곳이다. 까마귀 오자와 매화 매자를 사용하는 오매향나무는 500년 전 안동권씨가 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마을의 동신인 바위에 향나무와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었는데 6.25 때 폭격으로 대나무가 죽고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무의 수형이나 바위를 잘 살펴보면 심었다기보다는 자생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오매향나무옆 방파제에 바닷물이 들어올 수 있도록 구멍이 뚫려 있는데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이곳으로 바닷물이 들어온다. 파도의 충격을 줄여보려 마련한 이 구멍은 그 효과를 충분히 보고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구멍처럼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스트레스가 밀려오거나 건강이 악화될 때 기존의 생활에 틈이 되어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해주는 구멍. 여행이 이런 구멍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노물리에서 경정항으로 가는 바닷가에 있는 바위들과 군초소, 해안가 바위 위의 해녀상

석리마을 입구에서 바라본 풍경, 멀리 축산항의 죽도산이 보인다.
도로에서 내륙 쪽으로 위치한 석리마을. 바다 쪽의 밀도 높은 집들과는 달리, 최근에 집들이 들어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석리마을 입구의 도로변 풍경
이대가 마을 곳곳에 방풍용으로 식재된 석리마을의 풍경
오매향나무가 자라는 바위섬 주변의 제방구멍과 서낭당. 제방구멍으로는 수시로 파도가 밀려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길 없는 길을 가며(경정 3리-차유항-죽도산 전망대-축산항)

경정 3리에서 그동안 도로로만 걸어온 한을 풀기 위해 바닷가로 갔으나 바닷물이 통행로를 막는다. 비가 그치고 날이 개인 것 같아 길을 바꾸었는데 파도에 발목이 빠져가며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러나 파도에 몽돌이 구르는 소리와 넘실 절벽을 치는 파도가 주는 생동감은 무엇보다 기분 좋았다. 경정항을 지나갈 때는 파도가 더 심하게 친다. 경정 2리 가기 전 차유돔바위가 있는 해안엔 세 개의 안내판이 있다. 하나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세운 사진 찍기 좋은 녹색명소 안내판과 영덕군에서 세운 청룡과 백호의 기가 살아 있는 기 받기 좋은 곳이라는 안내판이다. '좋아. 기 좀 받아보자." 나머지 하나는 경북 동해안 국가지질공원임을 알리는 '경정리 백악기 퇴적암' 안내판이다. 이 시점에서 갑자기 장례식장에 가면 길게 늘어서 있는 화환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깔끔하게 이 세 가지 안내판을 한 번에 세웠으면 좋았을 것을. 물론 예산이 다 다르니 나름 이유는 있다. 바닷가로 내려가 층층이 쌓여 있는 퇴적암의 단면을 바라보며 바닷길을 따라 걷는다.


파도가 몽돌을 굴리며 만드는 바다의 노래를 들으며 길 없는 길을 간다
세월이 만들어 놓은 시간의 흔적을 바닷가의 바위와 사면에서 읽는다. 우리는 그 위를 걸으며 조금씩 인간의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경정 2리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길이 막혀 있고 이전의 통행로 위에 흙을 성토해 놓아서 길이 어지럽다. 길이 이렇게 된 내막을 모르는 걷기여행자들은 그저 툴툴거리며 조심해서 길을 계속 갈 수밖에 없다. 차유항을 지나 축산천 하구까지 이어진 해안 절벽길로 들어서는 마을 입구 도로로 파도가 밀려 들어온다. 어둑해져 가는 시간이 되니 파도가 더욱 거칠어진다. 오늘 이 마을은 이곳저곳 걷기여행자의 발길을 잡는 것이 많다. 소금기가 만든 회갈색 포말을 지나 산길로 오르니 좀 전까지 길을 방해했던 파도가 아름다운 경관이 된다. '역시 보는 것과 가는 것은 차이가 크다.'

길을 막아 다닐 수 없게 해놓은 모습과 물이 마을 앞까지 밀려오는 모습. 그래도 경정 2리의 해안은 아름답다

죽도산이 가까워질수록 파도는 점점 거칠어진다. 오늘 하루의 대미를 참으로 격하게 반겨주는 파도들이다. 축산천 하구에는 바닷가 모래밭을 성토하고, 파도가 부딪치는 모래사장에 방파제를 쌓고 리조트를 지었다. 모래밭은 공유수면인데 어떻게 이런 시설을 지을 수 있나 싶다. 그들은 분명히 지번이 있는 토지라고 주장하겠지만 나중에 바다가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두고 봐야 한다. 바다의 경계를 사람이 그을 때 왜곡된 자연이 어떤 식으로 표현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죽도산을 오르지도 않았는데 어둠이 내린다. 오늘은 아래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하루의 일정을 접는다. "오늘 저녁은 또 무엇을 먹어야 하나."


어둠이 내리는 죽도산과 축산천 하구의 바닷가. 골목에 도착했을 때에는 어둠이 몰려온 길을 가로등이 밝혀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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