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대곡천은 울주군 두서면 내와리에 있는 백운산 계곡 너덜지대의 바위틈에서 송송 솟아오르는 샘에서 시작합니다. 너덜지대라 돌이 많으니 탑을 쌓기도 수월했을 것이고 그것이 탑골샘이라는 샘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주먹을 단련하듯 골짜기의 바위들을 두들기며 흘러내린 물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돌조각들을 싣고 두동면 천전리와 언양읍 대곡리를 지나 태화강에 합류하며 바다를 보러 나갔습니다. 바다까지 가지 못한 잔돌들은 고은 흙이 되어 천전리와 대곡리의 여울을 지나 소(沼)에 퇴적되었습니다. 외로움에 지친 흙들을 공룡들이 찾아와 함께 놀아주었고 그들이 떠나자 또 오랜 세월이 지나 사람들이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계곡 옆 바위에 새겨 놓았습니다.
사람들은 북쪽의 산에서도 오고 바다에서 고래를 잡던 이들도 왔습니다. 그들은 하늘에 제사 지내고 건강과 풍요를 기원했습니다. 다시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우리는 그 각각의 백악기라 말하고 신석기, 청동기, 삼국시대라고 대나무 마디처럼 시간을 구분하였습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 시간의 마디를 한지역에서 한꺼번에 볼 수 있습니다.
반구대암각화로 널리 알려진 대곡리 암각화군에 다녀왔습니다. 비록 멀리 떨어져서 보긴 했지만 디지털망원경으로 고래 암각화를 보았고 대곡천을 따라 천전리까지 걸으며 공룡발자국과 사람들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충분히 여유 있게 걸어도 서너 시간이면 되니 이 몇 시간으로 수천만 년에서 수천 년의 시간을 넘나들 수 있다는 건 이 나라에 사는 큰 혜택입니다.
이 일대 지역은 층층이 쌓인 흙들이 압력을 받아 암석이 된 퇴적암층입니다. 하천 주변에 숲을 이루고 있는 산림에는 소나무와 굴참나무가 넓게 분포하고 있으며, 천전리에 이르는 계곡에는 졸참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가을이 된 요즘에는 숲길에 잠시 멈추어 귀 기울이면 큼지막한 굴참나무 열매들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반구대에서 정선이 그린 그림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해 보고 고래를 비롯한 청동기 시대의 바닷가 사람들이 표현한 다양한 암각화를 보았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실물을 보지는 못했지만 디지털망원경을 통해 선명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니 크게 실망스럽지는 않습니다. 다만 사람이 적은 평일에 방문하면 좀 더 넉넉히 시간을 가지고 볼 수 있습니다. 천전리의 암각화에서는 청동기시대의 독특한 문양과 가면그림을 손쉽게 찾을 수 있고,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화랑 시절의 모습과 어린 진흥왕의 흔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 다섯 시간 동안 내려와 천천히 숲길을 걷다 보니 해가 뉘엿 지려합니다. 이렇게 역사와 자연이 살아 있는 곳에도 잡초라 불리는 식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생명력 강한 잡초들이 사는 건 당연할 일입니다. 살짝 구름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는 해는 잔광을 길게 드리워 대곡천 물결에 윤슬이 되어 반짝입니다. 가을 오후 햇살은 헤프지 않습니다. 물가의 돌밭에 달뿌리들이 자라고 그 뒤로 망초들이 무리 지어 있습니다. 멀대처럼 서있는 이 식물들은 풀 치고는 키가 큰 식물에 속합니다. 나라가 망하는 시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래식물로 이름의 '망'자도 그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망초는 '흥'하게 하는 식물입니다. 주로 버려진 텃밭이나 나지에서 자라는 망초는 개척자식물입니다. 황폐화된 땅에 들어가 생존하며 그지역에 유기물을 쌓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땅에 유기물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다른 식물들이 들어오고 망초는 자신의 자리를 내줍니다. 물러날 때를 아는 식물인 것입니다. 해 질 무렵 해를 등지고 서있는 망초를 보면 밭일에서 돌아오시는 부모님의 모습 같기도 합니다. 오늘도 하천변의 망초들은 뽀얀 종자를 달고 이제는 돌아가 쉴 때가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살짝살짝 몸을 흔들며 배웅합니다. 정말 이젠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