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을 시작했다. 도시 근교에서 농사를 짓는 친구가 소일 삼아 뭔가 재배해 보라고 땅 두어 평을 빌려주었다. ‘주말농장’ ‘텃밭’이라는 단어가 주는 평화로움, 여유 같은 게 맘속으로 확 들어와서 흔쾌히 고맙다고 하며 시작했다.
한 뼘 땅이지만 농사는 농사였다. 이미 다년간 농사를 짓고 있는 친구의 권유로 상추, 고추, 가지 등을 심었다. 모종을 파는 상가에 가서 나름 이것저것 고르는 재미도 있었다. 흙을 갈무리하여 구멍을 파고 모종을 심고 물을 주고 사진도 찍으며 첫날 우리는 밀레의 ‘만종’ 속의 농부가 된 것, 마냥 해 질 녘에는 마음까지 뿌듯해져서 돌아왔다.
모종을 심어놓고는 며칠 동안 이런저런 집안일로 텃밭은 잊어버리고 있었다.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모종을 심어놓기만 하면 뭐 하냐? 물도 자주 주고 보살펴 줘야지.”
전문가 농부의 한 소리를 듣고 우리 부부는 부랴부랴 텃밭으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일주일 전에 심은 상추 모종 20개 중에서 5개가 시들시들, 거의 고사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허겁지겁 조리개로 물을 주며 상추, 고추, 가지, 토마토까지 아직 작디작은 생명들에게 나는 미안하다고 속으로 인사를 건넸다.
모종들이 스스로 일어설 때까지 키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낮의 뜨거운 햇볕에 몇 개가 녹아버렸고 연속된 폭우로 또 네다섯개가 거센 빗줄기에 스러졌다. 심어만 놓고는 세심하게 돌보지 않았던 나는 어린 식물들에게일종의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며 그 이후로는 거의 매일 텃밭에 드나들었다.
그러자 시들시들했던 어린 모종들은 제법 힘을 얻어 몸을 지탱하고 작은 잎들을 하나둘 피워내기 시작했다. 신기했다. 그리고 고마웠다. 그 작은 것들이 뿌리를 내리고 하늘로 두 팔을 소리 없이 수줍게 뻗어 올리는 모습을 보니 말이다.
그런데 놀라운 현상은 또 하나 있었다. 내가 정성 들여 심고 물 주고 가꾸는 상추, 고추 모종 옆으로 끊임없이 솟아나는 잡초의 존재였다. 모종이 시들시들해져 있을 때도 그 옆의 잡초는 기세등등 굴하지 않은 모습으로 쑥쑥 올라와 보란 듯이 어깨를 떡 벌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텃밭에 갈 때마다 당연히 잡초를 뽑았다. 그런데 다음번에 가보면 또 어김없이 여기저기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어쩌다 일주일 정도 지나고 간 날이면 그 성장 속도에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내가 물 한번 준 적이 없다. 애면글면 물을 주며 흙을 북돋우어 주는 내 상추 모종과는 달리 땡볕에서 건, 폭우 속에서 건 아랑곳하지 않았다. 분명 엊그제 뽑은 자리인 것 같은데 비슷한 잡초가 또 올라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씩씩하게 혼자 잘 자란다. 분명 잡초인데, 피해를 주는 해충 같은 것, 이로운 내 농작물에 해를 끼치는쓸모없는 잡초.
그런데 나는 점점 그 잡초들의 생명력에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이런 느낌이 낯설어 나는 한참이나 잡초를 바라보았다.
최근에 본, 넷플릭스에서 상영되는 한 드라마가 떠올랐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 이야기가 나오는데 육아 초보인 한 여자가 맘 커뮤니티에 육아 관련 정보를 요청하자 엄마들이 순식간에 깔끔하게 정리해서 답을 보냈다.
먹는 거, 입는 거, 자는 것 등과 관련하여 하루에 2번 단백질 공급을 하며, 매일 다양한 종류의 비타민을 챙겨 먹이고(비타민 C, B, D 등) 모닝 워크라고 해서 아침마다 영어단어나 수학 연산 몇 개는 꼭 하게끔 시키고 방 안의 습도는 50%에서 60% 정도로 맞추고….
‘아, 요즘 엄마들은 저렇게 아이를 키우는구나.’ ‘세련되고 고급지다.’
라는 생각이 들며 문득 지난 시절 나의 육아가 떠올랐다.
워킹맘이었던 나는 이리저리 갈팡질팡 허둥대며 첫 아이를 키웠다. 둘째 때는 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소진되었기도 했고, 잘 크겠거니, 하는 근거 없는 나의 믿음과 더불어 아이는 그럭저럭 무사히 잘 자라주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경제력이 대부분 비슷한 엄마들이 고르고 고른 유명 유치원에서 배우고, 유치원 수업이 끝나면 엄마 손에 이끌려 다양한 체험학습에 다니느라 바빴다. 일하는 엄마든 전업주부든 아이를 24시간 완벽하게 돌보는 엄마들의 에너지가 놀라웠다.
최고의 교육 프로그램, 체험, 균형 잡힌 영양식, 영양제, 최적의 수면 환경, 공부 습관 등 어느 하나 소홀함이 없는 돌봄 속에서 아이들은 대부분 비슷비슷한 모습으로 성장하는 듯 보였다. 어쩌다 튀어나오는 아이의 취향과 작은 바람들은 엄마의 완벽한 육아 프로그램과 스케줄 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버려지고 순위가 뒤로 밀려졌다.
그 아이들은 내가 심어 가꾸는 모종들 같았다. 물을 잘 주고 흙을 북돋워 주며 끊임없이 돌봐줘야 자라는.
그런데 잡초들은 어찌하여 저리 잘 자라는 걸까? 죽으라고 뽑아내고 짓이겨도 어디선가 다시 삐죽 고개를 내미는 그들. 물을 일일이 안 주니까 땅속에서 더 힘차게 뿌리를 사방으로 뻗으며 스스로 물길을 찾아다니는 건 아닐까? 햇빛을 더 많이 받으려고 좀 더 고개를 위로 들이밀며 키를 키우는 건 아닐까?
잡초 예찬이라니 농사짓는 사람이 들으면 욕먹을 이야기다.
문득 잡초처럼 자라는 아이들을 상상해 본다. ‘결핍’이 결핍된 아이들이라고 하지 않던가? 부족함을 경험해보지 않으니 얻으려고, 찾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심심해서 궁리하고 하다, 놀이기구를 만들어 낼 필요도 없다. 장난감은 넘쳐날 만큼 많다.
‘아이의 감정을 다치게 하지 않기’, ‘감정 읽어주기’가 육아의 금과옥조가 되다 보니 아이는 혼나고 야단맞는 일에 너무 서툴다. 살다 보면 야단맞고 혼나는 일이 얼마나 많을는지 아이는 모른 채 10대가 되고 20대가 된다. 그래서 야단맞고 혼나고 비난을 받으면 그냥 주저앉는다.
친구와의 다툼도 엄마들끼리 해결한다. 아이 대신 엄마가 먼저 억울해하고 미안해하고 분노한다. 아이는 제 스스로 온전히 억울해하고 미안해하고 슬퍼할 겨를이 없어서, 경험이 없어서, 속상해하며 우는 친구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없다.
사고 싶은 학용품을, 장난감 자동차를, 인형을 며칠 밤이고 손꼽아 기다려 본 적이 없어서 어린이날 선물에도 아이는 더 이상 하늘만큼 우주만큼 기쁘지 않다.
텃밭에서 잡초를 뽑다가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잡초같이 크는 아이들을 상상해 본다. 물을 안 주어도, 흙이 모자라도, 햇빛이 잘 안 드는 자리라도, 돌멩이가 많은 거친 땅이라도 거침없이 쑥쑥 자라 올라오는 구릿빛 얼굴과 마음을 가진 아이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