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아래 설 너에게 03.
“뭘 받아낼 생각이에요?”
“그건···.”
한울의 말을 끊듯, 현관에서 도어락 버튼 소리가 들려왔다. 낯선 환경에서의 많은 변화가 감당하기 힘들었던지, 리아는 반사적으로 한울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한울은 괜찮다고 리아의 한 쪽 어깨를 감싸 쥐었다. 하지만 리아는 한울의 그늘 아래 몸을 웅크렸다.
두 번 정도 비밀번호가 틀리고 나서야 문이 열렸고, 빛과 함께 법복을 입은 단발 머리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에는 염주를 들고, 등 뒤로는 천으로 만든 회색 행낭을 매고 있었다. 가슴이 꽤 큰 편이었는데, 넉넉한 옷을 입고 있어서 크게 부각되어 보이진 않았다.
“현관 비밀번호를 몇 번을 틀리는거야.”
“내가 그렇지, 뭐. 그런데 한울, 현관에 못 보던 신발이 있네.”
법복 차림의 여성은 한울의 뒤에서 얼굴만 내밀고 있는 리아를 보고 놀란 듯 멈춰섰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세상천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집에 여자를 데려왔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호국. 이상한 소리는 하지 말고.”
자신은 마치 여자가 아닌 것처럼 말하며, 리아를 유일한 여성으로 몹시 특별하게 대하는 태도. 한울은 별다른 언급없이 리아의 등에 손을 얹었다. 리아는 등 뒤로 느껴지는 한울의 온기에 마음이 조금 편안해 졌다.
한울은 리아를 거실 소파에 앉히고 맞은 편 1인 소파에 편히 앉았다. 호국이라는 여성은 뒤로 매고 있던 행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리아 곁에 나란히 앉았다. 리아는 어깨를 움츠리고 그녀를 경계한 반면 호국은, 만면 가득 미소를 띠고서 두 손을 가지런히 포개어 모았다.
“부처님의 가피로 우리 오늘 이 자리에서 함께 만나게 되었군요. 반가워요, 저는 호국 법사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머리카락이 있는 재발 법사입니다.”
합장을 하고 꾸벅, 고개를 숙이는 호국을 보고, 리아는 어설프게나마 손을 따라 모았다. 공손히 인사를 나누려, 나름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자, 호국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한울은 리아에게 호국을, 호국에게 리아를 소개했다.
“이 쪽은 내 오랜 친구인 몹쓸 땡중. 그리고 이 쪽은 내가 어젯밤에 주워온 애완동물.”
호국은 리아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대꾸했다. 무례한 말에는 익숙한 듯 마땅한 언급조차 없었지만.
“미친놈. 기행이란 기행을 하다하다 못해, 이제는 사람까지 주워오는군.”
“전후 사정도 모르면서, 대뜸 욕부터 박지마라.”
호국은 염주알을 돌리며 이어 중얼거렸다.
“강아지 같아 귀엽긴 하다만, 업이 쌓여 인연이란 쉽게 맺는 것이 아닌데···. 관세음보살.”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대화 도중 투척된 난데없는 욕설에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바뀐 리아는 손을 내저었다.
“제가 어제 강의 다리에서 투신하려고 했었는데, 한울님이 살려주셨어요.”
“아이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호국은 끔찍한 말을 들은 것처럼 눈을 질끈 감고 염주 알을 셌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염주를 보던 한울은 소파 손잡이에 팔을 걸치고서 턱을 괴었다.
“전에 이야기 했었지. 천옥계곡의 물 귀신.”
“의뢰받고 퇴마하러 간다고 하더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퇴마는 잘 끝냈어. 돌아오는 길, 기차에서 너무 오래 앉아있다보니 다리가 아파서 역에서 내렸었거든. 버스를 타지 않고 다리를 건너서 집까지 걸어오는데 중간쯤 되는 난간에 누가 서 있는거야. 처음에는 물귀신인가 했는데···.”
연신 염주 알을 돌리던 호국은 혀를 찼다.
“깊은 산 속 계곡도 아니고, 도심 한복판, 유유히 흐르는 강에 물귀신이 어딨어.”
“그렇지. 그래서 자세히 보니까 왠 여자가 막 떨어지려 몸을 앞으로 숙이길래.”
“대뜸 낚아챘구만.”
“얼마나 놀랐던지, 아무 생각도 못하고 몸부터 날렸어.”
호국은 다시금 리아에게 눈길을 돌렸다. 까맣고 긴 생머리에 작고 예쁜 얼굴, 특히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듯 살짝 처진 눈이 어린 강아지를 연상케 했다. 사람에게 특유의 분위기 혹은 아우라는 게 있다고는 들었는데, 리아를 만나보니 호국은 그 말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의 깨끗한 흰 피부가 우아함을 더했다.
“연예인인가요? 어쩜 이렇게 빛이 날까.”
“감사합니다. 저는 배우 지망생이에요. 오디션에서 번번히 떨어지는 ···.”
“그렇다고 다리 밑으로 떨어지면 안되지.”
말을 마친 호국이 실내온도가 약간 더운 듯, 법복의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한울은 마실 음료라도 꺼내오겠다며 주방으로 향했다. 한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리아도 엉거주춤 따라 일어나서 그를 쫓았다.
“아이고, 진짜 강아지잖아···.”
거실에 가서 도로 앉아있으란 한울의 지시가 있고나서야, 리아는 터덜터덜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호국은 손수건을 도로 주머니에 넣으며 장난스레 물었다.
“혹시 개 띠예요?”
“아뇨, 호랑이 띠예요.”
“무인년생?”
“네? 무인?”
리아가 알아듣지 못하자, 호국이 질문을 바꿔 다시 물음표를 건냈다.
“98년생?”
쟁반에 과일주스를 담아오던 한울이 대화를 엿들은 듯 퉁명스레 말했다.
“이름부터 물어봐라, 좀.”
뾰족뾰족한 말투와 달리 한울은 코스터까지 바닥에 내려놓고 잔을 전해주었다. 호국의 앞에는 오렌지 주스가 담긴 컵을, 리아의 앞에는 방울토마토 몇 개와 바나나를 하나 올린 작은 접시를 조심히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한울님.”
“주인님이라고 부를 기세예요.”
호국의 농담에 리아는 두 눈을 깜빡였다.
“한울님, 그렇게 부를까요?”
“먹을 것 좀 줬다고, 뭔 주인님이야.”
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행여 한울이 기분이 나쁠까봐 걱정이 되었던지 황급히 말을 보탰다.
“아니, 집주인님이란 뜻으로···.”
호국은 주스를 마시다가 움찔하고, 쿨럭거렸다. 한참을 기침하던 호국이 호쾌하게 웃어댔다.
“호랑이 양은 이름이 뭐예요.”
“리아예요.”
“외모만큼 이름도 이쁘네. 나는 정축년 97년생 소띠예요. 언니라고 불러도 좋아요.”
“호, 호국 ···.”
리아는 빨갛게 익은 얼굴로 더듬거렸다.
“··· 언니.”
일순간 두 눈에 하트가 맺힌 호국은 꺄, 소리를 내며 덥썩 리아를 껴안았다. 호국의 큰 가슴에 폭 안긴 리아는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녀가 버둥거리자, 호국은 리아를 더욱 힘껏 껴안았다.
“좋습니다, 합격!”
“뭐에대한 뭘로 인한 합격인거냐···.”
한울이 심드렁하게 말하자, 호국은 리아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한울은 1인용 소파에 깊게 몸을 묻으며 연이어 중얼거렸다.
“일하러 왔으면 쓸데없는 대화는 관두고, 일 이야기나 하자.”
흐흐, 웃은 호국은 바닥에 내려뒀던 행낭을 집었다. 안에는 뭐가 많이 들어있기라도 한 듯, 볼록한 모양이었다. 호국은 행낭 안에 손을 넣어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듣는 사람이 기분 상하지 않도록 단어를 잘 찾아 고른 것 같았다.
“리아 양, 이제 일 이야기를 하려해서, 자리를 좀 비켜주겠어요?”
“아냐, 그럴 필요 없어.”
한울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리아의 다리에 손을 얹었다.
“리아씨도 함께 할 거니까.”
리아도, 호국도 그의 눈빛이 일순간 반짝였다고 생각했다. 호국이 물음표를 난사하려는데, 한울이 앞서 상황을 설명했다.
“리아씨는 흑호교 다이아등급의 신도야. 나를 새로 가입할 신도라 속여 교주인 검은 여우 녀석을 만나게 해주기로 했어.”
“쿠로 키츠네를 그렇게 쉽게 만날 수 있어?”
행낭에서 서류뭉치를 잔뜩 꺼낸 호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울은 리아를 바라보았다.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는데까지 여러 절차가 있긴 하겠지만, 교주님을 만나게 해 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기회는 한 번 뿐이에요. 그 뒤부터는 코인으로만 쿠로 키츠네님을 접견할 수 있어요.”
“교주를 만나는데 코인을 지불하다니, 소문이 사실이구나.”
호국은 탄식을 내뱉었다. 염주알을 묵묵히 돌리던 그녀는 불현듯 떠올랐는지 말을 보탰다.
“아니 그보다 다이아 등급이라니, 돈을 얼마나 쓴 거에요.”
“전 재산을 ···.”
리아가 말끝을 흐리자, 호국은 아이고, 관세음보살을 연호했다.
“그런데 쿠로 키츠네님께 뭘 받으러 가신다는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한울 녀석. 도대체 어디까지 말한거야.”
대답을 미루고 한울은 팔짱을 꼈다. 호국이 그를 흘겨보자, 마지못해 대꾸하긴 했지만.
“리아씨도 이제 우리의 동료니까.”
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호국은 머리가 조금 아픈지 관자놀이를 짚고서 대답했다.
“우리는 ···.”
호국은 커피 테이블에 놓인 서류 뭉치를 들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오랜 친구이긴 해도, 함께 일하지는 않는데, 이번에 커다란 의뢰가 하나 들어왔어요. 일본에서 넘어온 신흥 종교, 흑호교에 대해서 알아봐 달라는 내용이었고, 그 과정 중에 영력과 도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단 자료를 이만큼 모아오긴 했는데, 전부 외부자 증언에 불과해서 잠입이 필요하다고 느끼던 차···.”
리아는 그녀로부터 서류를 건내받아 천천히 읽어보았다.
“그렇군요, 맞는 이야기도 있지만 누군가 지어낸 듯한 틀린 이야기도 있어요.”
“우리로서는 분간할 수 없어서, 고심하던 중이었어요.”
호국의 말이 끝나고, 한울이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는 쿠로 키츠네로부터 신도 전원의 명단과 창립 이후 헌금 액수, 그리고···.”
“전부 말해도 되는 거야?”
한울의 말을 호국이 끊어냈다. 그녀는 법복을 추스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이고, 흑호교의 다이아등급 신도인데···.”
“리아씨는 내가 여태까지 만난 사람 중에 영이 가장 맑은 사람이야.”
리아는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영이 맑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으나, 한울의 말을 들은 호국은 흐음, 소릴 내며 자신을 보다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너, 아깐 리아씨더러 언니라고 부르라고 하지 않았나.”
“아니, 이건 서로 다른 문제야.”
두 사람의 말을 묵묵히 듣던 리아는 주먹을 꼭 말아쥐고 힘주어 말했다.
“한울님을 배신하지 않을거에요.”
리아는 다시금 마음을 담아, 정성껏 이야기했다.
“저를 살려주시고 거둬주신 한울님을 배신하는 일은 결코 없을 거에요.”
호국은 리아의 단단한 말에 곧은 마음이 전해졌는지, 연신 관세음보살을 중얼거렸다. 손으로는 염주알을 끊임없이 돌렸다. 호국은 길게 숨을 내쉰 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동료라고 생각하고 말씀해 드릴게요. 우리는 쿠로 키츠네를 생포하러 갑니다.”
“생포요?”
“네, 대한민국에 넘어와 기이한 능력을 앞세워, 종교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국민들의 재산을 갈취하는 흑호교를 처단하기 위해서, 쿠로 키츠네의 금고를 열어 그 안에 들어있는 USB를 꺼내오려 합니다.”
“흑호교 관련 내부 데이터를 원하신다는 거죠? 서버에 잠입하는 편이 빠르지 않을까요?”
리아의 질문에 한울이 대답했다.
“소용없었어. 사이버 보안 관련 인력들은 실패했어.”
“지금 이 사안으로 움직이고 있는 모종의 팀이 있는 건가요?”
한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작전명은 여우 토벌 1919. 우리는 영력과 도력을 써서 잠입하는 선봉대야. 주어진 기한은 일본 총선이 있을 가을.”
“일본 총선?”
한울과 호국은 서로를 한 차례 마주 본 후, 리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한울의 목소리는 전과 달리 결이 단단하고 또 진중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흑호교에 헌금한 돈이 일본 정계로 흘러 들어가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