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아래 설 너에게 02.
한울은 바닥에 놓인 장검을 들어서 가볍게 휘둘렀다. 먼지로 케케묵은 공기가 깨끗하게 갈라지는 듯, 기분좋은 바람 소리가 났다. 검의 탄성이 훌륭해 날은 휘두르는 방향으로 낭창 휘었다. 리아는 흩뿌려져 있는 부적들을 몇 개 주웠다. 노란색 종이에 알 수 없는 붉은 글씨가 잔뜩 적힌.
“부적이라니, 퇴마사는 무당같은 건가요?”
“완전히 다르죠.”
“어떤 점이?”
“나는 무당처럼 귀신을 사역하지 않고, 쫓아내는 사람. 퇴마사.”
그의 말에 리아는 들고 있던 부적들을 놓쳤다. 그녀 주변으로 노란 종이들이 꽃잎처럼 흩뿌려졌다. 손에 들린 마지막 부적이 바닥에 떨어질 때 쯤, 한울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하던 리아의 표정 절박하게 바뀌었다.
“··· 한울씨, 신병을 고쳐주세요.”
한울의 팔을 붙잡고, 리아가 중얼거렸다.
“내게 붙은 귀신을 떼어내 주세요.”
그녀의 동공이 맥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한울은 리아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찾는 듯, 고개를 갸웃 거리기도 했다. 깨끗할 정도로 맑은 리아의 눈빛에, 한울은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네?”
“리아씨에게는 잡귀가 없어요.”
“그치만 ···!”
한울은 손에 들린 장검을 한쪽 바닥에 던져놓았다. 확실히 단언하는 한울의 말과 함께 찰그랑대며 바닥에 부딪치는 쇳소리가 가슴 속을 시원하게 했다.
“리아씨의 허리 통증은 병원에 가야 하는 문제예요.”
리아는 마음 한켠에 의아함이 남았던지, 손톱을 깨물었다.
“병원에서는 아무런 이유도 찾아내지 못했어요. 만나는 무당들은 전부 신내림을 받아야 한다고 했었고요.”
“글쎄, 분명히 사기꾼들이었겠지.”
“하지만 쿠로 키츠네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시길 신령의 짓이라고 하셨었는데 ···.”
리아의 말에 한울이 눈썹을 치켜떴다.
“쿠로 키츠네?”
그녀는 생각을 곱씹는 듯 손톱을 깨물었다. 그리곤 허리의 통증이 미약하게 느껴졌는지 양 손으로 허리를 짚었다. 한울은 한 손으로 턱을 부비다가, 다시금 되물었다.
“흑호교黑狐敎의 교주, 쿠로 키츠네?”
리아는 한울과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의 대답에 놀랐는지 한울의 눈이 커졌다.
“리아씨는 검은 여우교의 신자입니까?”
“맞아요. 저는 등급이 꽤 높은 검은 여우단이에요. 쿠로 키츠네님과도 몇 번이나 만났어요.”
“그럼 돈이 없을 리가 없는데?”
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쿠로 키츠네님을 만나려면 갖고있는 코인을 반납해야 해요.”
리아는 바닥에 떨어진 부적들을 한 장, 한 장 주웠다. 그리고 묶음을 잘 정리해서 한 쪽에 내려놓았다. 한울은 아까부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말이 줄었고, 리아는 그런 한울에게 다시금 부탁의 말을 꺼냈다.
“쿠로 키츠네님을 만나느라 몇 안되던 전 재산을, 소지하고 있던 코인들을 전부 탕진했어요. 이제는 집도 없고, 생활할 수 조차 없게 되었어요. 부탁드려요, 제 몸에 붙어있는 귀신을 퇴마해 주세요.”
한울은 리아의 손을 잡고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거실 소파에 나란히 마주보고 앉았다. 그는 리아의 손목 부근을 잡고 맥을 짚듯 눈을 감았다.
리아는 숨을 고르게 내쉬려 노력했다.
어쩌면,
어쩌면 퇴마사인 한울씨가 허리를 낫게 해 줄지도 몰라.
무당을 만나서 굳이 굿을 하지 않더라도,
지긋지긋한 통증이 가실지 몰라.
“없어요.”
한울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리아씨는 잡귀가 붙어있기는커녕, 보통의 사람들보다 영이 훨씬 맑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왜 다들 나에게 신내림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 걸까요.”
“사기꾼들을 많이 만난 건 리아씨의 잘못이 아녜요.”
한울은 잡고있던 리아의 손을 내려놓았다.
“리아씨, 흑호교에서 신도 등급이 어떻게 되나요?”
“병을 고치기 위해서 전 재산을 헌금했어요. 저는 가장 높은 다이아 등급이에요.”
“다이아···.”
“쿠로 키츠네님과 만나다보니, 남은 코인은 하나도 없지만.”
한울은 턱을 괴었다.
“흑호교에서 헌금 액수에 따라 가상화폐인 코인을 발행해 주고, 코인의 수만큼 신도의 등급을 매긴다는 게 사실이군요. 그리고 교주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 코인을 사용해야 한다,라 ···. 신도들은 결국 전재산을 탕진하게 될 테고 교단은 점점 배를 불리겠군요.”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마세요. 헌금이 늦어 코인을 늦게 받을수록, 코인 하나당 가격이 점점 비싸져서, 앞서 헌금한 신도들은 코인을 그저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재산이 불어나니까요. 흑호교의 신도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어요. 우리는 그저 코인을 갖고만 있어도, 교주님의 하늘같은 은혜를 받아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어요.”
“다단계라는 거예요.”
한울의 따끔한 말에, 리아는 찔린 듯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시라니까요.”
한울은 리아의 양 뺨에 손을 얹었다.
“흑호교는 사이비 종교예요.”
모욕적인 말을 들은 것처럼 리아는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왜 그렇게 못된 말을 하는 거죠? 쿠로 키츠네님의 놀라운 영적 능력을 알게 된다면, 한울씨의 말을 정정하고 싶어질 거에요.”
“왜 놀라운 영적 능력이 있는 그 녀석이 리아씨의 허리 통증을 고치지 못했죠? 전재산을 다 쓸만큼 많이 만났다면서.”
“그건, 그건 저도 잘 모르겠지만 ···.”
한울은 심드렁한 말투로 리아의 말을 잘라냈다.
“고질적인 허리의 통증, 내가 없애줘요?”
리아는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선,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한울은 푸, 숨을 내쉰 후 두 팔을 얽혀 팔짱을 꼈다.
“허리의 통증을 없애줄 테니까 리아씨, 내가 시키는 대로 할 거에요?”
“저는 이제 돈이 없어요.”
리아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렸다.
“내가 언제 돈 달라고 했어요?”
“그럼, 그러면?”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사그라 들자, 한울은 엄한 목소리로 꾸짖듯 말을 이었다.
“앞으로 허리를 굽혀서 손으로 발끝을 잡는 스트레칭은 금지. 요가 중 고양이 자세도 금지. 누워서 상체를 젖히듯 들어올리는 자세도 금지예요. 엎드려 있지도 마세요. 알겠어요?”
“네, 네···.”
“앞으로 자기 전에, 누워서 다리를 45도 정도 들어올리고 버텨요. 무릎을 세우고 누워서 엉덩이를 들어올리는 운동도 조금씩 하고요. 체력이 된다면 플랭크라고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몸을 일자로 만들어서 버티는 것도 괜찮아요.”
“네, 네···.”
한울의 말에, 자세를 상상해 보는 듯 리아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꼭 인근 공원에 가서 산책하기.”
“산책하기라니, 그런 걸로 허리가 좋아질까요?”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잖아요.”
“··· 아, 알겠어요.”
한울은 하, 숨을 내쉬곤 말을 마무리 지었다.
“마지막으로, 허리가 못 견디게 아플 때는 바로 병원을 가는 거에요.”
“돈이 없는데 어떻게 병원을···.”
“내가 대신 줄 테니까.”
리아는 손이 떨리는지 스스로 두 손을 꼭 맞잡았다. 그리고 읏, 하고 숨을 삼켰다. 어떻게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는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래뵈도 꽤나 유명한 퇴마사라 벌이에는 문제가 없고, 한동안 거둬 먹일 애완동물이 생겼다고 여길 테니까 마음 불편해 할 필요는 없어요.”
“감사합···.”
“하지만 밥은 한 그릇 씩만 먹어야 해요.”
리아는 알겠다며, 한울의 손을 덥썩 맞잡았다. 한울은 맞잡힌 손을 슬그머니 빼내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왜일까, 귓가가 빨갛게 물든 것만 같은.
“함부로 손을 잡는다거나 그런 것도 안돼요.”
한울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까 그 작은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저 청소를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태연하고 자연스럽게, 등 뒤의 리아에게 말을 붙였다.
“그 사기꾼, 쿠로 키츠네 이야기를 마저 해 봅시다.”
리아는 진공청소기를 작동시키는 한울에게 대꾸했다. 진공청소기의 소음이 너무 커서 잘 들리지 않는지, 한울은 몇 번이나 거실 쪽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리아의 말을 재차 물었다.
“교주님을 나쁘게 말하고 싶지 않아요.”
“전 재산이 털렸는데도, 정신을 못 차렸군요.”
한울은 쯧, 혀를 찼다.
“리아씨의 생각이 바뀔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신도가 아닌 외부인의 눈으로, 흑호교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수 밖에 없겠어요.”
한울은 진공청소기를 다용도실에 도로 가져다두고, 거실로 돌아왔다.
“안 그래도 최근 의뢰받은 일이 흑호교에 관련된 일인데 ···.”
그는 걸레를 적셔와서는 작은 방의 가구들을 닦기 시작했다. 거실에 들릴 정도의 약간 큰 소리로, 한울은 이어말했다.
“리아씨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리아는 거실 소파에서 일어나, 작은 방으로 향했다. 창문을 열어뒀기 때문일까, 아까와 달리 맑은 공기가 방 안에 가득했다. 부적 묶음도, 장검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도와드릴 일이 있다고요? 뭐든지 할게요. 정말 뭐든지요.”
“어쩜 사람이 경계심이 이렇게 없어.”
“저를 이 방에서 지내게 해주시고, 병원비도 내 주신다고까지 하셨는데, 저는 정말 무엇이든지 ···.”
한울은 리아를 뒤로 하고, 걸레를 화장실에 던져두었다. 손을 씻는 와중에 리아가 화장실의 불을 켜고 따라 들어왔다.
“그래서 제가 뭘하면 될까요?”
“일단 화장실에는 따라 들어오지 마세요.”
“아, 예 ···.”
리아가 죄송하다고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 화장실 밖으로 나가자 한울이 다시금 길게 숨을 내쉬었다. 리아는 작은 방에 들어가서, 몇 안되는 가구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한울은 그녀의 등 뒤에서 앞선 질문에대한 답을 했다.
“다이아 등급이라는 리아씨의 신분을 이용해서, 흑호교의 교주, 쿠로 키츠네를 만나게 해 줘요.”
“코인이 없어서 어려울 거에요.”
리아는 텅빈 두 손을 들어보였다.
“뭐든 좋으니 방법을 생각해 봐요.”
“어떤 방법이든 좋다고요?”
“네. 거짓말을 하더라도 괜찮으니까 방법을 생각해봐요.”
리아는 턱을 괴었다.
“한울씨가 흑호교에 가입할 새 신자라고 소개하면, 쿠로 키츠네님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모든 새 신자는 교주를 만날 수 있나요?”
“아니죠, 다이아 등급인 내 소개를 받고 온 새 신도라는 게 중요하죠.”
리아는 한울에게 다가가서, 손을 잡으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곤 손 대신 그의 옷 소매를 잡았다.
“제가 쿠로 키츠네님께 한울씨를 안내할게요.”
“좋아요, 생각지도 못하게 일이 순탄히 풀리는 군요.”
이를 드러내고 웃는 한울의 말에 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울씨. 그런데, 쿠로 키츠네님을 뵙고서 뭘 어떻게 하려고요?”
“아아, 그건···,”
한울은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비밀이에요.”
말해달라, 보채듯 리아는 잡고 있던 옷소매를 살짝 흔들었다.
“아까 우리 흑호교를 사이비 종교에 다단계 사기라고까지 했었잖아요. 그런데 왜 쿠로 키츠네님을 만나 봴 생각을 하시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건 ···.”
리아의 맑은 눈동자에 한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속사정을 실토했다.
“이번 의뢰예요, 저는 놈에게 받아와야 할 게 있어요.”
“놈···?”
“일본에서 넘어온 신흥 종교, 흑호교의 사이비 교주, 쿠로 키츠네. 그 못된 음양사 녀석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