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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리고딕 Feb 26. 2023

에펠탑보다 벨렝탑,포르투갈 리스본

서유럽 변방의 포르투갈을 대제국으로 이끈 도전정신

서유럽의 변방에 위치한 포르투갈이 갑작스럽게 해상강국으로 세계 역사의 큰 장을 장식하며 등장하고 굵은 역사의 선을 긋고는 극적인 등장처럼 급격하게 몰락하며 강대국 제국의 위치에서 사라져 갔다.


  리스본 테주강을 마주하며 포르투갈의  대항해시대를 연 포르투갈의 항해의 주역을 기리기 위해 세운 발견기념비와 벨렝탑을 마주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세기의 명소인 파리의 에펠탑 보다도 물론 에펠탑은 너무 아름답지만 이곳의 다소 소박한 벨렝탑이 나에게는 더 가슴에 와닿고 정감이 간다.

 

  개인취향의 차이기도 하겠지만 에펠탑은 그 웅장함과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그 주변은 안 보이고 나 홀로 잘난 맛에 우뚝 솟아 그곳에 서면 오로지  에펠탑만 보였는 데 포르투갈의 벨렝탑은 주변의  강과 바다의 풍경과 어우러진 자연환경이 탑과 함께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포르투갈 위기의 순간을 잘 대응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며 미래의 성공이 안 보이는 막막한 상황에서 바다를 향해 나아갔던 이곳 선조들의 도전정신과 새로운 곳에 대한 탐험가 정신이 주변 풍경과 함께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발견 대 항해 시대를 개척한 이곳 선조들이 바다로 나간 시절에만 해도 그리스 시절의 지식이 퍼져있던 시대라 바다가 서로 이어져있지 않고 그래서 대서양 바다와 인도양 바다가 각각 따로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테주강을 뻣어나간 배가 외부세계로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없는 시대가 아니었던가. 그런 시대에 과감하게 당시 기술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미래를 향해 당당히 나갔던 포르투갈 해양 개척자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포르투갈은 갑작스럽게 세계 역사를 주도하는 선도자로 등장하였지만 여느 강대국 제국들이 성장기에 그러하였듯이 주변환경에 대한 나라의 위기의 순간에 선대의 지도자들은 진영을 가리지 않고 국가의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당대의 최고의 기술자와 지식인을 자신의 가장 가까이 두고 미래를 차곡차곡 준비한 결과로 세계 최고의 강대국 위치에 서게 된 것이었다.


 또한 갑작스러운 포르투갈의 몰락도 너무 순식간에 우연히 일어났다고 볼 수는 없다.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에 지진으로 인한 자연재해까지 겹친 위기의 사건들이 있었지만 인간 역사의 여느 대제국들처럼 그들의 몰락의 시작은 큰 위기와 재앙의 결과라기보다는 자신들 스스로의 노력 없이 너무 손쉽고 편하게 누리는 부와  권력에 도취된 지도자가 있었고 자신들의 편안함이 선조들이 바다를 향해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한 결과임을 잊어버린 안일한 순간에 찾아왔다.


  대제국들의 몰락의 순간은 언제나 같은 역사를 반복한다. 몰락의 서막은 항상 쉽게 손에 쥐게 된 부와 권력은 쉽게 빠져나가리라는 것을 망각하고 어찌어찌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믿고 국가의 중대한 미래를 안일하게 대처한 지도자층이 국가를 이끌고 있었고 이는 어렵게 일군 대제국일지라도 너무 쉽게 몰락으로 이끄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위기의 대 재앙의 순간에 훌륭한 지도자는 재앙을 극복하려현명함을 갖추고 대처하지만 미련한 지도자들은 국가의 위기에 순간에서 조차도 자신의 안위에 집착하며 진영과 편 가르기에 우선순위를 두고  자신의 제재를 유지하는 쪽으로  힘을 쓰며 국가를 쇠락의 길로 이끌었다.  

포르투갈 벨렝지구에서 바라본 대서양 일몰

포르투갈의 제1왕조를 연 알폰소 1세는 해군을 창설했고, 1293년에 포르투갈에서는  상인을 중심으로 해상보험 제도까지 만들어지면서 포르투갈에서는 이미 활발한 무역활동으로 상품거래가 활발한 상태였다.그러나 향신 료가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 오자 더해서 그동안의 해상무역을 보다 활발하게 확장할 필요성이 생겼 고 그동안 접근이 어려운 품목인 향신료등의 물품도 무역항목에 추가하기위해 접근이 불가능한 인도양으로 도전하고 싶은 기대심리가 생겨나고 있었다. 포르투갈은 이미 와인, 소금, 가죽, 의류를 주변국에 수출하고 있었고 갑옷과 화약, 상품, 고급 옷감은 수입하고 있었다.
 
 왕조는 해군을 강화하고 당시 이탈리아의 우수한 해양기술을 전수받기 위하여 제노바 출신 마누엘 페사나(Manuel Pessanha)를 거액의 연봉을 주고 해군사령관으로 영입했다. 폐사나 이후 유능한 뱃사람들이 포르투갈로 이동하였는 데 15세기에 엔리케 왕자의 지원으로 바람의 힘으로 항해할 수 있는 캐러벨(caravel) 선이 개발되었다.


캐러벨은 해양기술 분야를 획기적인 발전시킬 수 있었는 데 바람의 힘으로 어디든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들은 대서양의 바람 방향과 별자리를 통해 좀 더 정확하고 오래 항해하는 기술을 발전시켜 나갔다. 항해를 위한 지도에도 관심이 많아 유럽 각국의 지도정보를 구해 지도를 결합하여 세계지도를 그려냈다.


 
 

항해왕자 엔리케(1394~1460) 사후에도 엔리케가 뿌린 씨앗들은 계속 피어나 포르투갈의 모험은 계속되었다.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꿈에 그리던 아프리카 최남단까지는 한번도 가지를 못했다. 아프리카까지 가기에는 오랜 시간이 더 걸렸고 1년에 평균 위도 1°씩 남하했다. 앞서 그린 지도 위에 뒷사람이 새로운 지도를 덧그리며 그들의 꿈을 향해서 조금씩 다가섰다.  

  

마침내 적도 근처 상투메프린스페(São Tomé and Príncipe) 섬에 포르투갈의 식민도시를 건설했고 기니만으로 들어가 황금해안(Gold Coast)을 발견했으며 금과 노예무역을 시작했다. 이후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노예시장을 독점했다. 그 결과 1년에 800명의 흑인노예가 리스본으로 끌려가 거래되었고 포르투갈 인구의 10%를 흑인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국왕 주앙 2세는 해외 탐험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1488년 5월에 마침내 그들이 계속 시도하였던 아프리카 남쪽 끝의 곶(cape)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폭풍 속에서 발견했기에 그곳을 폭풍의 곳(Cape of Storms )이라고 이름 지었지만, 주앙 2세는 이곳에서 앞으로 인도양을 건너갈 수 있는 희망을 얻었다 해서 희망봉(Cape of Good Hope)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희망봉 발견은 고대 로마제국의 지리학자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미(Claudius Ptolemy)의 견해를 뒤엎는 대 발견이 되었는 데 당시까지도 프톨레미의 인도양과 대서양은 분리되었으며 육지를  통해 가야한다는 황당한 주장이 받아들여지던 시대였다.


국제적으로는 1492년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왕가가 결혼하면서 스페인 왕국을 형성했고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대 항해시대를 양분하여 해양시대를 발전시켜 나갔다. 진정한 전성기를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열게 되는 데 다가마의  원정대는 1497년 7월 4척의 함대에 170명을 태우고 포르투갈을 떠나 희망봉을 처음으로 돌았으며 계절풍을 기다려 인도양을 건넜다.


디아스의 함대는 이듬해인 1498년 5월 20일에 캘리컷에 도착했다. 이 날은 역사적인 날로 기록되는 데 그동안 포르투갈이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 직접 인도 항로 개척을 수차례 시도한 이후 마침내 성공한 날이었다. 2년 후인 1500년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은 국왕의 명령을 받아 인도로 가는 함대 사령관을 맡았다. 카브랄의 항해로 브라질을 발견하였고 16세기는 포르투갈이 세계의 해상패권을 쥐며 진정한 대제국의 길로 들어선 시기이다.


이제  포르투갈은 전 세계 해안에 요새를 만들고 동남아시아와 인도의 향료는 포르투갈이 독점했고, 아프리카에선 노예무역으로 엄청난 돈을 벌게되었다.  이 시기에 유럽 대륙은 종교문제로 인한 전쟁으로 혼란스러웠으며 외부 이슬람과의 전쟁으로 오스만튀르크의 침략을 막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는 데 포르투갈은 가톨릭으로 하나의 정신세계를 구축하며 식민지 개척에 정신을 쏟아 부을수 있었다.

 

발견대항해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제로니무스 수도원

 인도항로를 개척한 지 10년도 못되어 포르투갈은 인도양을 빙 둘러싸며 요새를 형성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이 개척한 인도양은 오래전부터 아랍과 페르시아, 인도의 무역선과 중국함대가 다니던 곳이라 포르투갈이 새로 진입하자 1509년 2월, 인도 디우에서 동양과 서양의 해상 패권을 다투는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디우 전투로 이름 불리는 이 전부에서 이슬람 국가를 축으로 한 기존세력과 베네치아공화국이 포르투갈과 대결하였는 데 수로는 이슬람 연합군이 훨씬 우세하였으나 전투는 포르투갈의 압승으로 끝났다.


포르투갈 전함의 장거리포가 이슬람 배가 접근도 하기 전에 다 파괴시켜 버렸다. 포르투갈이 오스만튀르크와 인도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하며 동양과 서양이 인도양에서 싸운 첫 해전으로 기록되었다. 이후 인도양은 포르투갈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런 최상의 승리의 가도를 달리기 시작하자마자 포르투갈이 구축한 향료와  노예무역은 급작스럽게 향료 무역은 네덜란드에, 노예무역은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무너지게 된다. 최고 강대제국의 위치를 누릴 새도 없이 너무 쉽게 금방 끝나버렸다. 포르투갈은 스페인 왕가가 포르투갈을 동시 다스리게 되면서 포르투갈은 자기나라 전쟁이 아닌 스페인의 전쟁을 지원하게되는데, 스페인은 포르투갈의 전쟁을 도와주지 않는 등 내부적 요인으로 해외 요새가 하나씩 떨어져 나가고 급격히 포르투갈은 세력이 위축되어 갔다.


포르투갈이 스페인의 적과 싸우게 되며 국가재정이 줄고 포르투갈의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포르투갈 귀족들의 항의하자 펠리페 3세는 포르투갈에 전왕과 다른 정책을 폈다. 그런데 상황이 더 좋아지는 게 아니라 그나마 남아 있던 포르투갈의 자치권마저 빼앗아버렸다. 그에 해서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세금을 중과하고 포르투갈 귀족들의 지위도 발탁했다. 포르투갈 정부의 요직은 스페인 귀족들이 다 차지했다. 필리페 3세는 포르투갈을 동등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스페인 왕국의 한 지방의 주로 격하시키려 했다.


포르투갈의 혼란한 정세가 계속되며 브라질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브라질이 독립하면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식민지로 서부 앙골라와 동부 모잠비크만 남게 된다.


포르투갈이 계속 위축되는 데 비해 영국은 성장가도를 달리는 데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에서 이집트까지 남북으로 잇는 종단정책을 추진했다. 오랜 우방이었던 포르투갈과 영국은 중대한 기로를 맞게 되는 데 그 이유는 영국이 남북으로 확대하는 종단정책을 밀고 나가려면 포르투갈이 이미 진출한 동서진출선을 뚫고 나가야 했다. 영국이 포르투갈에 철수를 요구하고 영국과 전쟁을 원치 않았던 카를루스 1세는 영국의 요구에 즉시 응하였다.


국민들은 분노했고 공화파의 주도로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으며 급기야 지속된 갈등 속에서 1908년 2월 1일, 카를루스 1세 국왕과 루이스 필리프 왕세자가 리스본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당한다. 이 시건 이후 암살사건에서 살아남은 왕자 마누엘이 18세의 나이에 마누엘 2세로 등극했다.


1910년 10월 1일 포르투갈의 주요 도시에서는 공화주의 세력이 공화제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테주 강 하구에 정박하던 군함에서는 일어난 반란을 진입하라는 왕가의 명령을 거부하고, 리스본 주변을 점거했다. 10월 4일, 군함 2척이 리스본 왕궁을 향해 포격을 가하게 된다.
 
 1910년 10월 5일, 리스본에는 공화파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군중들이 리스본 시내로 몰려나와 쿠데타군을 지지했다. 공화파들은 왕정을 종식하고 공화정을 수립했다. 포르투갈의 마지막 왕 마누엘 2세는 리스본을 빠져나가고 1139년부터  770년간 이어지던 포르투갈의 왕정이 종식된다.(출처 : 아틀라스뉴스)


그러나 왕정의 종식이 곧 민주화와 국민들이 원하는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진 못했다. 준비가 흡한 채 시작된 공화정은 혼란을 거듭하고 왕정대신 독재체제로 전환되며 정치 침제기에 접어든다. 그러나 오랜 독재자의 죽음 이후 1974년 4월 25일 포르투갈에서는 혼란기에 보기 힘든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카네이션 혁명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오랜 독재 이후 평화적으로 그 어떤 피의 희생없이 공화정체제가 수립된 것이다.


반란이 일어날 수 있는 분위기에서 짧은 시간에 아주 놀랍게도 누구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평화속에서 48년 동안 전체주의적으로 통치해 온 권위주의 독재를 종결시켰다. 그 결과  아프리카를 상대로 한 전쟁에 반대해 온 국민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500년의 식민 대국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독재에 대항하는 혁명군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군인들에게 카네이션을 선물하였기 때문에 카네이션 혁명으로 불리는 이 평화적이고 특이한 사건 이후 포르투갈은 이제 걸음마를 시작하는 어린 민주주의를 겪으면서 폭력이 동원될 사회적 분위기가 많았음에도 국가적 폭력이 동원되지 않았다.


포르투갈의 대항해를 거치며 대제국의 위업까지도 이루었다. 하지만 국민들은 대제국의 과업을 이룬다고 하여도 결국 그 대제국의 대가가 피를 부르고 사랑하는 자식과 가족들의 죽음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과연 대제국 그것이 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는 초월의 내면을 가지게 된 것일까. 대제국을  이룬 들 평등하고 평화롭게 제국의 혜택을 누리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삶은 큰 변화가 없고 희생이 컸던 과거 상처가 그들에게 더 이상의 전쟁을 거부하게 만들고 자식들의 죽음으로 희생당하기를 거부하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나라가 대 제국이 되어도 일반 국민들에게는 제국이 된 그들의 나라가 온통 주변국들의 잇권 다툼으로 나라가 더 혼란해진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국민들은 아프리카와의 전쟁을 계속 치르며 지속시키지 못한 영토확장의 꿈과 제국의 꿈을 다시 꾸기보다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본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작아진 그들의 영토 안에서 살며 오랜 혼란 속에서 벗어서 당장 누릴 수 있는 안정과 평화에 더 목말라 있었던 것 같다.


아직 포르투갈의 민주주의는 어리고 성숙하는 중이다.  리스본을 떠나갔던 젊은이들은 몇 년 전에만 해도 일자리를 찾아서 해외를 떠돌았지만 이제는 나를 안내해 주었던 가이드조차도 몇 년 전까지 자신은 해외를 떠돌고 있었지만 이제 자기처럼 오히려 리스본에  일자리가 많아  젊은이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고 설명한다.

정겨운 리스본의 밤


리스본의 밤은 흥겹고 젊다. 나는 포르투갈이 좋다. 벨렝탑의 멋진 야경도 가슴을 때리지만 그들의 음식과 포르투갈 사람들의 정겨운 말투와 관광지에서 헤매는 나에게 정보를 알려주려 멈춰서는 사람들의 따뜻한 눈빛도 그곳을 다시 찾고 싶게 한다.


대제국의 정상에서 추락한 이후 앞으로 정비해야 할 짐을 많이 지고 있는 젊은 민주주의의 포르투갈이지만 이제는 헛된 야망을 가진 일부리더들의 주도가 아닌 건강한 국민들의 단단한 선택으로 조금 느린 걸음이지만 카네이션 혁명이 이룬 그들만의 독특한 정권교체 방식처럼 발견대항해 이후 새 시대에 맞는 참신한 새로운 방식을 찾아 다시 전 세계를 향해 이번에는 전에 와는 달리 급격하게 나타났다 사라지지 않고 천천히 일어서면서 그 존재감을 보일 것이라 기대해 본다.


전 세계의 창의적인 젊은이들이 리스본을 방문하게 되면 매력이 넘치는 이곳에서 살고 싶어 지게 될 것같다.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이 모이고 있는 중이라 생동감이 느껴진다. 포르투갈 발견대항해 시절의 대제국은 쇠락하였지만 리스본의 낮과 밤은 이제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중이라 앞으로 어떤 요리가 되어 나올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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