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와의 첫 만남
세미나 강의를 신청하고 커리큘럼을 하나씩 들여다보던 중, 낯선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간디’. 고대와 중세 사상가들 사이에 갑자기 근대 인물이 끼어 있어 조금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디라고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흰 천을 두른 모습 정도였고, 사실 관심도 거의 없었다. 솔직히 비폭력이나 비저항 같은 말들은 어딘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간디는 평생 폭력을 겪으면서도 폭력으로 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끌려다니듯 당하기만 한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보다 주체적으로 자기 길을 선택했고, 다른 이들이 힘으로 증명하려 할 때 그는 힘을 쓰지 않는 방식으로 더 큰 힘을 보여주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인상 깊었다. 폭력을 당할 때마다 지혜롭게 풀어가려 애쓴 흔적이 자서전 곳곳에 남아 있었다. 단순히 참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분석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이 치밀했다.
그 부분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내 경험이 떠올랐다. 나 역시 어떤 폭력 앞에서 지혜롭게 풀어가려고 노력했던 적이 있었지만, 돌아보면 늘 아쉬운 마음이 남았다. 간디의 방식을 보며 그때 놓쳤던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상처 속 들여다보기
가족 안에서 들은 한 마디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다. 어머니가 지인의 조언을 듣고자 전화를 걸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그 아이는 성향이 사회복지사보다는 다른 일을 하는 게 낫지 않겠나.”
스피커폰 너머의 그 말은 너무 선명했고, 순간 숨이 막혔다.
나를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내 가능성과 성향을 단정 짓는 일이 이렇게도 가볍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친척에게서도 비슷한 말이 이어졌다. 대학교에 합격했을 때 축하 대신 돌아온 것은,
“거기서 나와서 뭘 하겠느냐”는 의문이었다. 그때는 괜찮은 척 넘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속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표현하지 못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금씩 쌓여 갔다.
그 무렵, 집안에 작은 일이 생기며 오래 묵혀 있던 감정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상대는 아무렇지 않은 듯한 말 한마디였지만, 그 말이 어머니에게 전해진 뒤 며칠 동안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더욱 힘들었다. 나는 결국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선택을 했다. 그 선택이 또 다른 오해를 불러왔고, 오랫동안 쌓여 있던 말들이 그제야 터져 나왔다. 감정이 격해지면서 서로의 말이 얽혔고,
결국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자리까지 이어졌다. 다행히 그 시간을 지나면서 우리는 서로의 오해를 조금씩 풀 수 있었다. 가벼웠던 말들은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오래 머물기도 한다는 것을, 그리고 말 한마디를 건네기 전에 잠시 멈추어 생각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알게 된 순간들이었다.
간디가 보여준 것
친척집에서 사과를 건넸던 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일렁인다. 사과가 오긴 왔지만, 나는 먼저 진심 여부부터 의심했다. 어쩔 수 없는 관계라서 형식적으로 건넨 말은 아닐까, 만약 서로 아무런 연이 없는 사이였다면 과연 이런 말이 오기나 했을까. 그런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스쳤다.
그동안 쌓였던 감정들이 워낙 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상처는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고, 말하지 못한 속마음은 그 깊이를 더해가며 천천히 굳어졌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사과 앞에서 주저하는 내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의 말보다 더 크게 다가온 건, 오랜 오해가 조금씩 풀리는 순간이었다. 사과가 완벽하거나 충분해서가 아니라, 그 말이 나를 붙잡고 있던 어떤 매듭을 아주 미세하게나마 느슨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전히 모든 것을 쉽게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 시간이 헛되지 않다는 생각은 들었다. 관계란 결국 이런 작은 흔들림 속에서 다시 조정되고,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날 이후로 나는 사과의 ‘완성도’보다는, 사과가 만들어낸 여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 여지가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던 감정들을 조금은 움직이게 했고, 그 움직임 자체가 이미 큰 변화였다.
아물지 않은 감정은 여전히 있지만, 그날의 사과가 나를 다시 현실로 불러낸 것은 분명했다. 사과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진 않지만, 누군가 건네는 작은 책임의 말이 관계를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그 사실만큼은 그날 제대로 배웠다.